두 개의 갈림길

발급번호-004

by stamping ink

선택의 기로에 서는 인생에 수많은 순간이 존재한다.

짜장 vs 짬뽕

팥붕(팥붕어빵) vs 슈붕(슈크림붕어빵)

후라이드 치킨 vs 양념치킨

어떤 선택을 해도 다른 하나에 미련과 후회가 남는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팩스민원이 들어왔어요."

사무실 내에 복합기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사회복무요원이 종이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다른 기관에서 보내온 종이에는 경력증명서를 요청한다는 신청서였다.


요 근래 몇 번의 민원을 경험하며 쓴맛도 보고 단맛도 본 나였다.

두려움은 줄어들었고, 신청인 앞에 넉살 좋게 이야기를 건네며 분위기를 풀어가는 요령도 터득됐다.

방문하여 신청하는 서류는 발급해 봤지만 팩스민원은 또 뭐지?

새로운 도전이 눈앞에 나타났다.

맘 같아서는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어차피 나의 일이 아닌가.


나의 천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전화 안 하려고 했는데 제가 물어볼 곳이 없어서 또 이렇게 부탁드리게 되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전산으로 모두 등록되지 않은 서류에 한해서는 해당 부서로 수기 발급 요청을 드리는데 팩스로 신청이 가능해요. 발급 처리하여서 다시 팩스로 요청한 곳으로 보내드리는 업무입니다."

바닥 같은 나의 질문에도 눈높이 대답을 해주었다.

나의 천사는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잠재우는 천상의 최고 천사다.


나도 천사만큼의 업무 수준에 이른다면 꼭 똑같이 천사의 대를 이어 왕천사가 되어주리라.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짐은 해보았다.


시간 여유는 있었다. 서류 작성을 마치고 꼼꼼하게 재확인을 했다.

마지막으로 번호를 적어야 하는 고무인을 찾았다.

어라? 똑같이 생긴 고무인이 두 개다.

두 개의 차이가 뭘까?

'발급번호, 교부번호'

두 고무인은 규격도 같고 기재내용도 같았지만 딱 하나 발급, 교부만 다른 글씨였다.

무엇을 찍어야 하나.


50%의 눈감고 찍기의 문제에 봉착하면 오답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나의 선택을 마지막으로 한번 믿어보고 찍을까? 아니면 나의 선택과 반대로 찍을까?

두 개를 다 찍을까?

받은 쪽에서 필요한 것만 사용하고 필요 없는 것은 지워서 사용하면 안 될까?


고무인 두 개에 잉크를 묻히고 고민에 빠졌다.

순간 고무인 옆에 매직으로 눌러쓴 작은 글씨가 보였다.


발급-fax 서류 보내달라고 할 때

교부-fax 서류받아서 민원이 줄 때


누가 이런 정답 커닝 페이퍼를 여기에 적어두었을까? 나와 같은 고민을 한 사람이 남긴 선물이었나?

나만 고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렇게 큰 위안이 될 줄이야.

당당하게 고무인을 찍어 눌렀다.


'발급번호 030 담당자 김응대(싸인)'

고무인에 비어있는 칸도 다 작성해 놓고 복합기 앞에 섰다. 요란한 기계음이 상대방 쪽 사무부서로 전송되는 기계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돌아왔다. 이제는 제법 민원업무를 해내는 내 모습에 가슴 벅찼다.

이젠 어떤 민원이 덤벼도 모두 내가 해결해 주겠어.


뿌듯한 마음으로 다른 업무로 넘어가려는데 사회복무요원이 외부전화를 끊고 나서 내게 귓속말을 했다.

"직인 안 찍어 보내셨대요. 다시 보내달라고 하시네요."

고무인에 성취감에 빠져서 제일 중요한 것을 실수해 버렸다. 떼어본 서류가 쌓여갈수록 실수는 줄어들길 바랐다.


눈앞의 선택에 빠져서 다음 일을 놓쳐버리는 바보 같은 일을 했지만 실수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하지 않던가..

실수는 쓰고 열매는 아직 맛보지 않았지만 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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