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구멍을 찾아서

발급번호-002

by stamping ink

증명서 발급 업무는 매일 정기적으로 처리하는 업무가 아니다.

민원인이 요청을 하면 발생하는 업무이고 근래에는 전산화가 되어 인터넷을 통해 발급받는 사람들도 많아지면서 출력의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이나 수기 발급을 받아야 할 사람들만이 찾곤 한다.


일주일 정도 자리에 앉아있으니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둘 익혀졌다.

나의 강점인 O형의 긍정적인 성격의 표본이자, 막내의 생존력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힘차게 인사로 분위기 뒤집기를 시도했다.

앉아서 일하다 보니 운동량 부족으로 급증한 뱃살 덕분에 복식호흡으로 발성이 우렁찼다.

노동법에 적힌 8시간 근무시간 내내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무성했던 사무실에서도 간간이 웃음소리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과학실무사로 근무 중인 근로자가 내 책상 앞에 섰다.

"응대 씨, 나 은행에 내야 할 서류가 있어서 그러는데 재직증명서 한 통만 떼주시겠어요?"

다른 업무를 배우고 숙지하느라 한동안 잊고 지낸 민원 업무였다.

뭐부터 해야 할지 텅 비어버린 뇌가 되었다. 긴장한 티를 내선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목소리에서 삑사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재... 재직증명서요? 으흠. 죄송합니다"

그리곤 책상 위에 꽂아둔 민원처리 매뉴얼을 꺼내 급히 다시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수없이 긴 출퇴근길 버스 안에서 업무 숙지를 한다고 읽고 또 읽었던 업무 중 하나인데 난생처음 들어본 단어처럼 입에 붙지 않았다. 매뉴얼 순서를 읽어 내려갔다.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시고요."

"네? 여기 일하고 있는데 신분증도 내야 해요?"

아차, 신청인 신분증 확인이라 적혀있지만 신청인 신분이 명확한데도 이미 뱉어버린 말을 수습하려니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응대 씨, 바쁜 것 같으니 퇴근길에 받으러 올게요. 오면서 신분증 가지고 내려올게요."

그녀는 프로다.

한눈의 초심자를 가려냈다.

그녀가 배려해 준 시간을 여유 있는 척 미소로 답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지진이 나기 시작했다.

누가 나 좀 도와주려나? 모두 자신의 업무에 열중이다 보니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근로자 재직증명서는 따로 전산화되지 않아서 수기로 발급해야 하고 컴퓨터 안에 양식이 있을 거예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구원의 음성이 옆자리에서 들렸다. 구세주는 나보다도 10살은 어린, 조카뻘 나이 되는 사회복무요원이었다.

무뚝뚝하기가 근처만 가도 냉기 풀풀 인 녀석이 조용히 해결방법을 던져주고는 자신의 업무를 시작했다.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 한 채 목례로 대신하고 마우스 광클릭이 시작되었다.


어디 있다는 거지? 뭐가 있다는 거지?


c드라이버 한쪽 구석에 [민원]이라는 폴더를 찾았다.

재직증명서 양식이 다행히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한글파일을 띄우고 한 칸 한 칸 채워 넣어 갔다.

발급번호, 이름, 생년월일, 주소, 근무 시작일... 근무기간, 근무기간?

근무기간도 작성해줘야 하는 건가.


순간 포털사이트에 나오는 날짜 계산기가 생각났다. 그래, 그걸 이용하면 간단한 것을...

입사일과 현재 날짜를 요령 있게 적었다.

포털에서 계산해 준 날짜를 기입해 근무기간까지 작성하고 직인을 찍기 위해 결재 보고를 하고 교부 준비를 마쳤다.


퇴근시간이 되자 재직증명서를 받으러 내려왔다.

"여기 있습니다."

당당하게 서류를 내밀었다.

"음? 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 그녀의 입가가 한참 들썩이더니 마지못해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갔다.


민원업무에 조금 익숙해진 1개월 후 [민원] 폴더 안에서 첫 발급했던 재직증명서를 다시 열어본 적이 있다.

재직기간: 3366일

얼굴이 화끈거린다. 통용 사용되는 날짜표기법을 무시한 나였다.

재직기간은 '몇 년 몇 개월 며칠'로 기재해 줘야 하는데 포털에 나온 날짜를 그대로 베껴 써 교부한 것이었다. 물론 제출처에서 별문제 없이 서류를 받아주었으나 민원담당자로서 얼굴이 빨개지는 순간이었다.


[민원]이라는 폴더에 이름 위에 F2 키를 눌러 폴더 이름을 고쳐 써넣었다.

[정신 차려! 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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