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이 주는 아늑함

발급번호-003

by stamping ink

매일 반복되는 일이 제법 손에 익어갔다.

일의 속도가 붙었다. 기세를 몰아 다이어리에 해본 업무를 꽉 채워 적고 읽고 또 읽었다.

다른 주어지는 업무가 늘어나니 처리할 때 문의 사항은 총괄 담당자에게 문의하라는 노하우를 얻었다.

"제가 담당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는 내용으로 문의 전화드렸습니다."

다들 풋내기 시절이 떠오르는지 가당치도 않은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아, 뭔가 모를 때는 총괄을 맡고 있는 담당자에게 물어보면 되는 거구나.'

역시 사람은 살고자 하면 죽으란 법은 없는가 보다. 바쁘게 일하는 옆자리 직원에게 신세 지기보다는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찾으니 믿는 구석이 생겨 부담스러운 긴장감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역시 민원을 신청하는 대민업무는 긴장감이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성적표를 떼고 싶어서 왔어요."

옅은 화장에 교복을 입은 앳된 학생이 사무실을 가로질러 내 앞에 섰다.

매뉴얼도 머릿속에 외우고 있었고 학생인지라 조금은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네. 신분증 주시고요."

학생은 신분증이라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단어에 갸우뚱거리며 학생증을 내밀었다.

새삼 어린 학생인지라 학생증에는 사진이나 숫자를 교묘히 가린 스티커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신청서와 학생증이 적힌 인적사항을 빠르게 스캔하고 넘겼다.


"어?"

신청서에 받아 들고 발급화면에 주민번호를 여러 차례 조회해도 오류가 뜨며 검색되지 않았다.

세 번 즈음이 오류 창이 뜨니 등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니 직원들도 힐끗거리며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신청서류를 구멍이라도 날 것처럼 실눈을 떠보았지만 잘못된 부분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오류의 원인을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저, 검색이 되지 않는데 전산에 등록이 안된 게 아닐까 해요. 해당 학교로 문의드려 볼게요."

"네? 다른 곳에서는 바로 떼주던데요? 이상하다."

다른 곳은 다 되는데 여기만 되지 않는다는 말에 식은땀은 줄줄 흘러대기 시작했다.

진짜? 나만?

화면에 멘털을 흔든 학생의 '이상하다'는 말이 고스란히 새겨졌다.

다시 입력하기 시작한 기본사항의 신청인 이름부터 오타다. 침착하게 여러 차례 다시 입력칸에 하나하나 차분히 입력했으나 발급불가는 변함없었다.


"야. 너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의 다른 친구들이 문을 살짝 열고 짜증을 내며 얼굴을 디밀었다.

"몰라. 딴 데는 바로 떼주는데 여기 이상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앳되고 착해 보이던 학생의 입에서 욕만 안 나왔다 뿐이지 거친 발음을 구사하며 불만을 친구에게 퍼부어댔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걸 알아차리는 눈치 따윈 없었으면 좋았으련만 이런 건 또 바로 알아차려버리는 나 자신을 탄식했다.

"학생, 미안한데 전산이 이상한 건지 제가 해당청으로 문의 전화 좀 해볼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딸 또래 아이에게 식은땀을 흘리며 이야기하게 될 줄이라곤 꿈에도 몰랐다.

짜증 난 표정의 학생은 보란 듯이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를 톡톡 건드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총괄 민원실 연락처를 찾아내 번호를 다급하게 눌렀다. 맑고 친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아무리 검색해도 민원인이 검색되지 않아서 문의 전화드렸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으신데요?"

"이상하게 다른 곳에서는 정상 발급되셨다는데 여기서 발급이 되지 않아서 혹시 전체 오류인가 문의드려 보려고요."

"여기서 검색해 드려 볼게요. 개인정보 좀 알려주시겠어요?"

"네. 주민번호는 000000-000000입니다."

"네? 다시 말씀 주시겠어요?"

"000000-000000입니다."

"아. 혹시 주민번호 뒷자리는 일곱 자리인데 여섯 자리만 불러주시는데 혹시 그렇게 입력하고 계신 걸까요?"

그랬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신청서를 보았다. '여섯 자리-여섯 자리' 숫자가 떡하니 적혀있었고 긴장감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바쁘신데 너무 죄송합니다. 제가 정확히 확인하지 못했네요."

"괜찮습니다. 많이 실수하시기도 하셔요. 천천히 응대하시면 해결하실 거예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녀는 천사였다.


무엇에 씐 것일까? 분명 신청서에 여섯-일곱 자리 숫자가 버젓이 여섯-여섯 자리 숫자로 적혀있다니...

이럴 땐 남 탓을 하게 되는 게 사람의 심리인 것인지 학생이 잘못 기재한 것에 탓을 돌리고 싶었다.

숫자를 잘못 써서 내가 당황했다는 걸 어필하듯 서류를 학생 앞에 다시 내밀었다.

점입가경으로 친구들까지 민원대 앞에 졸졸 모아 서서 늦는다며 투덜대는 이 어린 아가씨들을 어쩔꼬.

가능한 친절한 모습을 유지하는 노력을 갈아 넣었다.

나도 총괄부서 천사처럼 성인군자가 되어 응대해 보마.

"여기 보시면 주민번호 뒷자리를 잘못 기재하셨네요. 다시 작성해서 주시면 발급 도와드릴게요."

"예? 그걸 이제 알려주시면 어떻게 해요. 학원 늦었는데, 아 짜증 나. 됐어요."

투덜대는 아이들은 뒤도 안 보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성인군자는 링에 서 보지도 못하고 KO패 당했다.


"어머? 웬일이야. 자기가 잘못해 놓고 왜 저래?"

직원들은 위로해 주려 그들이 떠나자마자 내 근처에 모였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화장실을 다녀오겠노라 말하곤 나의 지정 칸을 찾았다.

군대에 가본 적은 없지만 군필자 중 어느 분이 화장실이 제일 편안했다고 하더니, 나의 안식처가 화장실 맨 끝 칸이 될 줄이야.


'특유의 향기 나는'-방향제와 제일 가까운 자리이다.

'따스하고'-유리 팔이 한쪽 벽에 있다.

'횬자만의'-조강지처처럼 배신하지 않고 내가 갈 때는 꼭 비어져있다.

'안식처'...

혼자만의 시간은 울렁이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역시 오늘은 불길했다. 아침에 맞춰본 오늘의 운세가 떠올랐다. 용하구나.


보이는 대로 모두 믿지 마라, 해결 끝에 망신수가 따라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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