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쉬운 일은 없어

발급번호-001

by stamping ink

"엄마. 나가서는 집에서처럼 주책맞게 행동하지 말고."


15년 만에 출근길에 오르는 내게 딸이 보내온 응원 메시지다. 흔한 말처럼 '집에서 애 보는 게 돈 버는 것'이라 는 말에 가정에서 충실한 존재의 정당한 의미를 두고 살아오던 '아줌마'가 나의 이름이 되었다. 집을 직장이라 생각하고 집안 살림을 총괄하는 책임자라는 막중한 업무분장은 내겐 감당하기 벅찼다. 지급되는 대가도 없이 상사 같은 어르신들의 영전 업무에 365일 퇴근도 휴가도 용납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것은 부족한 것들의 책망과 또 다른 일거리들만 반복되고 있었다. 가정일을 우습게 본 나의 가장 큰 실수였다.


인정받던 사회생활이 그리웠다.

과감히 가정 주부 사직서를 마음에 품었다.

나의 속내를 알게 된 집안 어르신들이라 불리는 상사들은 반려와 회유를 거듭했다. 집안 살림 담당자로서 찾을 만한 후임자는 쉽게 나올 리 없었다.


난 이중취업을 감행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는 모습을 티 나지 않게 준비했고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름 계획은 완벽했다.

취업의 바다에 뛰어들기엔 고물선은 잔파도에도 침몰되기 일쑤였지만 끝없이 도전을 했다.

탈락의 고통도 수차례 극복하자 잊었던 오기라는 것이 꿈틀댔다.

아껴야 할 어금니도 꽉 깨물었다. 결국 준비한 자에게 오는 기회가 나에게도 찾아와 주었다.

어르신 상사들의 씁쓸한 미소가 축하인지 아쉬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먼 거리였지만 정신을 차리니 지정된 '내 자리' 책상에 앉아있었다.


"사회생활 해 보신 경험은 있으신가요?"

나보다 출근시간이 이르게 도착한 직원이 말을 건넸다.

"10여 년 전이라 새롭네요."

왠지 15년이라고 하기엔 실수를 하게 될 때 경단녀라는 꼬리표를 탓할까 봐서 3분의 1이나 줄여서 대답했다.

"금방 배우실 거예요. 이 업무는 저도 한 적이 없어서 도움은 안될 거 같아요."

직원은 종이 몇 장을 내게 건넸다.


민원 매뉴얼

경력증명서, 재직증명서, 생활기록부, 재학증명서, 정원 외 관리증명서....


증명서라고는 민원 24라 불리는 정부포털을 이용해 등본만 출력해 본 적 있는데 내가 이런 과중한 업무를 해낼 수 있을까? 글씨는 눈에 들어오지만 머리에는 도착하질 않았다.


오전 시간이 마무리될 즈음 인증서가 발급되고 민원업무를 위한 화면을 띄울 수 있었다.

전산화되어 있는 시스템이라 화면은 간단명료했다.


"한번 본인 졸업증명서 연습 삼아 떼어보셔도 되세요."

옆자리 직원은 말 한마디를 남기고서는 자신의 키보드 위에 손가락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프로들 사이에서 나란 존재는 아마추어, 아니 신생아가 되어버린 채 한껏 위축되어 갔다.


나의 연배의 생활기록부는 전산화되지 않았는지 검색이 되지 않았다. 그럼 졸업증명서는 가능할까? 개인정보를 입력하고 누르니 나의 졸업증명서가 화면에 나타났다.


감이라는 것이 만져지기 시작했다. 왜 이 일부터 업무로 주는지 한 번에 알듯했다.

나중에야 깨우치게 되었지만, 코끼리의 발톱 밑의 먼지 같은 때를 만져보고는 코끼를 다 알았다는 자만의 늪에 빠져있던 순간이었다.


낯선 시간은 허둥지둥거리며 사라졌다.


"어땠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족들이 문 앞까지 달려와 서로 질문은 쏟아댔다.

"별 거 없었어. 할 만하던걸?"


할만한 일.

경력 10년 차가 된 지금, 그때로 돌아서 실수조차 인지 못했던 나에게 말을 해주고 싶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어."



교육청 소속 행정실무사로써 나의 업무 중 하나는 민원업무이다.

어떤 이에게는 제일 어렵다고 하고 어떤 이에게는 가장 단순한 업무라고 한다.

기술적으로 다가서면 인터넷 민원증명서를 발급받는 방법에 절차를 더해진 업무라서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변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수많은 민원인들의 진솔했던 만남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