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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날벌레 14화

14. 지금이야

소설 <날벌레> 14회

by 김영주

- 언니 대신 불 속에 뛰어든 재나의 완벽한 비상

- 난 계속 재나였어요. 누군가 알아주길 기다렸죠.

- 독보적인 분위기 여신, 재나는 누구인가


한동안 가벼운 외출도 하지 않고 은둔하던 배우는 그 사이 포털 메인을 도배하듯 장식하고 있는 재나의 기사를 스크롤하고 있었다.


한때 배우를 수식하던 키워드들이 모두 재나의 기사로 옮겨가 있었다. 대중의 관심도 마찬가지였다. 재나의 기사 아래 가득한 댓글의 내용들은 배우가 이전에 본 것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배우는 아침마다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재나의 기사를 볼 때마다 초조해졌다.


서둘러 재나의 창에서 나와 자기 이름을 검색창에 입력해 보자 그녀의 작품 활동과는 전혀 상관없이 부모가 저지른 사기 행각에 대한 사건 분석과 피해자의 심경을 담은 기사, 포스팅, 영상만 가득했다.


한동안 사람들이 열광한 날벌레 라이브 영상조차 이제는 조회수가 거의 그 자리에서 멈춰있었다.


새로 개설된 재나의 유튜브 채널 인트로 영상은 ‘인기 급상승 동영상’으로 채택되어 유튜브 메인 페이지에 올라와 있었다.


자기 채널의 영상 썸네일 디자인과 비슷한 화면을 터치하자 재나의 채널은 이미 배우의 채널과 구독자 수를 훌쩍 앞지르고 있었다.


배우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알았다.


그것.


수백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타난 이후, 그것은 배우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을 거의 똑같이 재현한 재나를 처음 보고 충격을 받았을 때도, 부모의 갑작스러운 부고로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조차 그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어지간한 충격에는 단련되기라도 한 것일까.


지금처럼 숨 막히는 상황에서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어야만 그것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배우는 한동안 잘 보지 않던 전신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이전보다 더 마른 몸은 이제 더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초라하고 볼품없게만 보였다.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또렷한 눈동자는 흐릿하고 탁해져 죽음을 앞둔 자의 눈빛처럼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배우는 이제 두 번 다시 그것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시 먹어야 해!


배우는 주방으로 달려가 냉장고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 속은 당연하게도 텅 비어 있었다.


배우는 허겁지겁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배달 앱을 설치하고 보이는 대로 장바구니에 음식을 담고 주문하려는 순간, 카드가 중지되어 사용할 수 없다는 알림 메시지가 울렸다.


배우가 쓸 수 있는 것은 명주가 언젠가 비상용으로 준 회사 카드가 전부였다. 그동안 벌어들인 수익은 계약 파기 소송을 빌미로 아직도 회사에서 지급되지 않고 있었고 이제 자신이 먹을 끼니조차 제 손으로 주문할 방법이 없었다.


배우는 뭔가 착오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명주는 분명 쉬어갈 것을 권했고, 아직 배우는 리나 엔터테인먼트의 소속이었다.


배우가 명주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신경질적인 대문 벨 소리가 들려왔다. 인터폰 화면에는 낯선 여자의 얼굴이 떠 있었다. 배우가 누구냐고 묻기가 무섭게 여자는 당연한 것처럼 답했다.


“집 보러 왔는데요.”


그때, 전화가 걸려 왔고 스마트폰에서 들려오는 명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액정 화면만 멍하니 지켜보던 배우는 이 집이 더는 자기 집이 될 수 없음을, 또 다른 화면 너머 보이는 저 여자가 새로운 이 집의 주인이 될 것임을 알았다.


배우의 전 재산은 새로운 사기 피해자들에게 압류당했고, 소속사는 강경하게 계약 파기를 요청하고 있었다.


부모와 함께 사업에 연루된 친인척들조차 그녀에게 모든 것을 전가한 정황을 알게 되자 배우는 순간 온몸에 피가 다 빠진 것처럼 아연한 기분이 들어 통화가 다 끝나기도 전에 스마트폰을 내던져버렸다.


이제 이 세상에는 자신의 편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절망에 휩싸이자 배우는 또다시 익숙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배우는 베란다로 박차고 나가서 커다란 창문을 열었다.


강한 바람이 얼굴을 때릴 듯이 거칠게 다가왔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휘청대는 몸을 두 팔로 감싸고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등 뒤에서 반복되고 있는 벨 소리는 범인에게 마지막 경고로 쏘아 올린 공포탄 소리처럼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다시 눈을 뜬 배우는 아득한 30층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지막까지 간절하게 ‘그것’이 나타나 주길 기대했지만 바람 말고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배우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아래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문을 열고 집으로 침범하기 전에 뛰어내리면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배우는 그제야 자신이 원했던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떠나고, 모든 것을 잃었는데도 살고 싶었다. 모두가 리나를 외면했을 때도,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도 그랬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를 드디어 알아차렸다.



소설 <날벌레> 내일도 연재됩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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