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날벌레> 13회
영화 ‘불 속의 여자’ 후속편인 ‘불에서 온 여자’의 주인공은 재나로 확정되었다.
재나는 예전의 배역 명을 그대로 활동명으로 사용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 역시 명주의 아이디어였다.
사실 배우에게도 명주는 ‘리나’라는 이름을 활동명으로 사용하자고 했었지만 동의하지 않았다. 화진 역할로 변신에 완벽히 성공하자 배우는 그 결정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배우는 명주의 말에 그대로 따른 재나의 결정이 성급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영화 시리즈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재나와 함께 패션 매거진의 화보를 찍게 된 배우는 이제 자신과 거의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그녀를 보자 찝찝해지다 못해 소름이 끼쳤다. 재나는 배우가 복귀할 때 입고 있던 그 몹쓸 가죽 슈트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대기실로 온 재나는 배우를 보자마자 과하다 싶을 정도로 허리를 접어 인사하고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선배님! 정말 뵙고 싶었어요.”
“선배? 우리 같은 해에 데뷔했잖아.”
배우는 재나가 과거 ‘비혈연 모녀’에서 3살 어린 동생이었지만 실제로 동갑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주는 ‘재나’를 적극 활용해 대중의 착각을 일으키게끔 재나의 나이를 배우보다 3살 어리게 설정하여 프로필에 띄워두었다. 대외적인 장소에서 배우는 여전히 재나의 언니 또는 선배님이어야 했다.
배우의 불편한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재나는 태연하게 옆으로 와 앉았다.
“뭐 좀 드셨어요? 이거라도 좀 드세요. 제로 슈거에 칼로리도 없다는데.”
배우는 재나가 내민 피로해소 드링크를 보며 겨우 치미는 감정을 눌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불리했다.
대답이 없는 배우를 보던 재나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엷은 미소가 스쳤다.
“라이브 정말이에요? 명주 언니한테는 물어봐도 자세히 말씀을 안 해주셔서요. 아, 그런데요, 전 믿어요. 너무 오래 굶다 보니까…. 진짜 음식 냄새만 맡아도 토할 거 같다니깐요. 처음에, 이 옷 입고 찍으라는 제안받았을 때 솔직히 좀 망설여졌는데 선배 생각해 보니까 이 정도 노력은 해야 하겠더라고요.”
이 애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나.
배우는 잠시 생각했다. 갑옷 같은 슈트 속은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을 것이다. 그걸 참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안쓰럽게 보였다.
한편으로 재나가 저 옷을 입을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게 놀라웠다. 소아비만이었던 거구의 어린 재나는 늘 구석에서 말없이 지켜보는 아이였다. 지금은 자신처럼 완전히 새로운 얼굴이 되었지만, 그 속에 언뜻 스치는 쓸쓸하고 고독한 눈빛을 배우는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어?”
배우가 자신도 모르게 궁금했던 말을 내뱉자 재나는 성형 수술과 메이크업으로 이전보다 두 배는 커진 눈을 더 크게 뜨며 말했다.
“전 한 번도 떠난 적 없는데요. 선배처럼 유명한 적이 없어서 그렇지…….”
“그럼…….”
“연기는 계속했어요. 누가 알아봐 줄 때까지. 명주 언니가 찾아왔을 때….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때가 왔다는 걸 알았어요. 언니는 정말 제 은인이에요. 선배한테도 그렇겠지만…….”
재나가 동의를 구하듯 싱긋 웃으며 배우를 보는 순간, 매거진 촬영 스태프가 들어와 단독 컷 촬영 순서를 알려주었다.
먼저 촬영하게 된 재나는 다시 한번 배우를 향해 꾸벅 인사하고 인공 거미줄이 쳐진 스산한 분위기의 스튜디오 세트장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 카메라 뒤에 선 배우는 그제야 재나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환한 빛 속에서 재나는 사진작가의 지시에 따라 거미줄에 걸린 것 같은 다양한 자세를 취했다. 순간 드론으로 만든 날벌레 소품이 날아들었고, 재나는 배우 방향을 향해 순발력 있게 돌아섰다. 재나가 드론 날벌레를 잡으려는 야생적인 자세를 즉흥적으로 재현하자 스태프들 사이에서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직 배우만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자신의 미소가 재나의 얼굴 위로 자연스럽게 겹쳐 보인 것이다.
갑작스러운 공포를 느끼며 주춤하던 배우는 돌아서다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명주를 보았다. 명주는 배우의 부모가 사고사 했다는 부고와 함께 이번 촬영은 재나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장례식장 앞에는 배우의 부모를 추모하는 수많은 화환과 기자, 유튜버, 그리고 배우의 부모에게 사기당한 피해자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보다 뒤늦게 장례식장에 도착한 배우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친인척은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배우는 부모가 벌인 사업은 편의점이 끝이 아니었으며, 친인척은 물론 일면식 없던 타인에게까지 사기 행각을 벌여 막대한 돈을 끌어 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배우가 다시 유명해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부모도 사기를 당한 입장이었지만, 그녀의 이름을 앞세운 덕분에 그들이 수습 못 한 피해액은 온전
히 배우의 몫이 되었다. 법적으로 유산을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대외적인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모두를 갚아야만 수많은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배우는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부모가 자신 모르게 저지른 일들부터 수습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배우가 사기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고, 계획적인 사기 설계였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모 시사 프로그램은 본격적으로 배우의 부모는 물론 배우와 연계된 모든 것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배우는 그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이 마지막까지 자신을 따돌리고 해외로 도피하려고 했다는 정황을 알게 되었다. 그때야 배우는 철저히 혼자 남은 감정을 느꼈지만, 누구도 그녀 곁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배우의 유튜브에는 그녀의 부모는 물론 그녀를 비난하는 댓글들이 쇄도했고, 명주는 이전 배우의 날벌레 라이브 사건에 대한 강렬한 트라우마로 사과 방송을 할 여지도 주지 않았다.
“당분간 좀 쉴래?”
배우는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명주의 물음에는 언제나 답이 정해져 있었고 대답이 딱히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장례식이 끝난 이후, 광고주들은 기다렸다는 듯 배우와의 계약 해지를 통보해 왔고 캐스팅 확정이었던 차기작 역시 투자가 중단되어 더는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배우는 그간 더욱 늘어난 전속 계약 광고들의 모든 위약금을 감내해야 했기에 소속사에도 큰 빚을 지게 되었다. 그나마 유지해 온 그녀의 유튜브 채널 역시 피해자 가족과 그들에 동조하는 네티즌들의 수많은 비난 댓글 때문에 운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배우가 돌아갈 곳은 첫 작품의 성공으로 마련한 자신의 오피스텔뿐이었다.
명주에게 빌린 차로 직접 운전해서 주차장까지 온 배우는 내리려다 말고 혹시 주변에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이 있는지 먼저 살폈다.
시동을 끄고 멈춘 차 안에서 숨죽이며 밖을 내다보자 적막한 어둠만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 차에서 내려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소설 <날벌레>는 매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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