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부터 수학까지 나는 모든 숫자를 혐오했다. 지금처럼 모으기, 가르기를 가르쳐주었더라면 나는 수학을 포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떼는' 슬프게도 그런 게 없었다. 어려운 걸 쉽게 가르치는 게 베스트였겠지만 국민학교 1학년 때 담임은 쉬운 걸 어렵거나 무섭게 알려주는 분이었다.
'99+99는 어렵게 계산하지 말고 100+100에서 2를 빼는 거야'라고 남편이 말했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99+99를 할 땐 세로 식으로 써서 위와 아래를 더해 착실하고 멍청하게 9*2=18 아래는 8을 쓰고 받아 올리고... ㅠㅠ 하아....
난 왜 이리 꽉 막힌 수포자가 돼버렸던 걸까
첫 단추부터 잘못된 게 틀림없다. 담임 앞에서 혼나며 산수를 풀던 기억이 생생하니 말이다. 책상 밑으로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했을 때 소리를 빽 지르던 모습. 아무래도 그때 담임을 찾아가 강력하게 항의해야 직성이 풀릴 듯싶지만 불가능하다. 그 양반이 우리 엄마랑 친한 대학 동기이기 때문. 체면을 중시하는 울 엄마에게 수포자 딸은 옵션에 없다. 그냥 내가 참아야지. 으이구.
그래서 정색하고 말하자면 그 순간부터 나는 모든 숫자가 싫어졌다. 2나 5처럼 딱 떨어지는 숫자가 아니라면 나에게 모욕감을 줄 뿐이다. 아직도 반복되는 악몽이 딱 두 종류인데 한 가지가 수학시간에 칠판 앞에서 끙끙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직장 다니던 시절 마감 5분 전에 내 컴퓨터 화면만 하얀 꿈이다. 둘 다 내겐 아주 아주 끔찍한 공포인가 보다. 현실에선 벌어질 리 없는 상황인데 아직까지 꿈에 나타나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수포자로 살아간다 치지만 그런데 애들 둘만은 제발 수학이 재밌길 바랐다. 수학시간마다 걸릴까 봐 초조해하고 지금 당장 폭탄이라도 떨어져 모두 대피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기길 얼마나 기대했던가. 본투비 MBTI 'N'인 나는 특히나 긴긴 수학 수업 때 오만 상상을 펼치며 시간을 견뎠다. 수많은 초중고 수학시간을 그런 마음으로 지냈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그래서 이런저런 강의도 찾아 듣고 정보들을 이삭 줍기 하듯 모으다 보니 서울 은평구에 '데카르트 수학책방'이란 존재가 내 레이다망에 걸렸다.
사실 좀 가기가 두려웠다. 책방지기 두 분 다 수학선생님인 데다가 수학책이 잔뜩 있는 책방이라니. 태초부터 수학을 무서워한 나로선 꺼려지는 장소일 수밖에. 인스타로 슬슬 탐색하다가 어느 순간 마음을 먹고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차에 시동을 걸며 생각한다. '수학을 재미로 풀다니 이상한 사람들이 많구먼'
이곳 인스타그램을 조금만 신경 써서 읽다 보면 수학책 작가로, 교사로 살아오신 두 선생님이 지향하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수학 책방에서 가장 천박한(?) 질문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어떤 문제집을 풀려야 하나요?"같은 질문일 거다.
그렇다. 나는 그 질문을 기어이 쭈뼛거리다 책방지기 쑥샘께 하고 말았다. 몇 달 전 일이지만 생생히 기억되는 선생님의 동공지진. 매일매일 문제집을 몇 쪽 풀려야 하는지? 그걸 매일 해야 되는 건지? 애들이 아프다고 하면 줄여줘도 되는 건지? 최상위를 풀려야 하는지? 오답노트는 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사실 이걸 누구보다 하고싶지 않았던 건 바로 나다.) 등 수많은 나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에 선생님은 우문현답을 우회적으로 알려주셨다.
많은 이야길 들려주셨지만 수학은 재밌어야 하고, 미취학 때 구체물 같은 것으로 수와 친해질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말씀이 기억난다. 수학 동화 몇 개와 교구를 사 나오면서 내가 저렇게 수학을 친절하게 배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겼고 집에 와서 아이 문제를 같이 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문제집을 뭘 같이 푸나 싶겠지만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내가 배운 꽉 막힌 방식이 아니라 '요즘 방식'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보기.
사고력 문제 한 개를 뽑아 같이 풀면 아이가 더 잘 풀 때가 많았는데(물론 내 수학머리가 바닥이라;;) 그걸 칠판에 설명해 달라고 하면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고 신이 나기도 했다. 또 막 상상공장이 돌아가서 다시 수능을 보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으니 이 책방 방문은 아이가 아니라 내게 심리치료 같은 효과를 주었다.
책방 서가에는 '저학년용' '고학년용' 이런 틀에 박힌 말이 없다. '수학과 화해하기' '수학 더 넓게 보기' '수학 잘 가르치기' 등 실질적이고도 고객의 마음을 건드는 포인트들이 있다. 수학 동화라면 보지도 않고 패스했었는데 깜짝 놀랐던 것이 내가 좋다고 생각했던 그림책들, 동화들이 '수학 동화'의 범주에 들어있다는 사실이었다. 하긴, 이미 내가 아는 세상이 다 수학인데 내가 피하려야 피할 수 없었을 게 당연하다.
데카르트 수학책방엘 다녀온 지 수개월이 지난 뒤 쏟아지는 언론의 관심, 성장하는 모습(최근엔 목동점까지 오픈하셨다)을 보며 사람들이 얼마나 '재미없는 수학'에 지쳐있었는지 생각하게 됐다. 나처럼 아예 등 돌린 사람들뿐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하면서도 좀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하던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고 위안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