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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Apr 10. 2021

선입견을 깬 ‘깔루아 밀크’

-깔루아와 우유

깔루아는 멕시코에서 생산되는 커피 리큐르입니다. 탄생의 기원을 추측해야 할 정도로 오래된 술이 아니고, 공장에서 생산되어 상표를 붙여 파는, 근본이 알려진 술입니다. 커피 원두와 사탕수수를 혼합해 증류주를 만든 후 바닐라와 캐러멜을 이용해 향을 입힌다고 합니다. 편의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접근성 좋은 술입니다.



처음 깔루아를 접한 것은 제과를 배울 때였습니다. 제과에서는 럼이나 꼬엥트로 같은 술을 제법 사용합니다. 그중 깔루아는 티라미수를 만들거나 커피 향 품은 과자를 구울 때 첨가합니다. 당연히 ‘술’이라는 마음보다는 ‘제과 재료’라는 생각으로 깔루아를 대했습니다. 아무리 티라미수를 좋아한다지만 밥 대신 먹을 정도는 아니고, 가족끼리 먹기 위해 굽는 과자의 양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게다가 20도짜리 술이니, 소량을 사용한다고 해도 아이와 함께 먹는 것에는 넣을 수 없습니다. 슬슬 병에 먼지가 앉기 시작했습니다.


커피를 배우면서 다시 깔루아를 소환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깔루아와 우유, 커피, 그 위에 휘핑크림을 올리는 깔루아 커피를 배우면서 잠깐 병을 꺼낼 일이 생겼습니다. 술은 잘 마시지만, 술을 첨가한 커피는 좋아하지 않는 탓에 술병은 곧 재료장 깊숙한 곳에 처박혔습니다. 네, 저는 위스키 넣은 아일리시 커피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일랜드 해변의 험난한 겨울바람을 맞은 후 다시 마셔보면 제대로 된 감흥이 올 것도 같지만, 안타깝게 아직까지는 그런 기회가 없었습니다.


비싼 재료를 버리는 것이 아까워 사용할 방법을 찾다 생각해 낸 것이 밤 조림입니다. 가을이면 만드는 저희 집 밤 조림 레시피(제 개인 레시피입니다)에는 깔루아가 들어갑니다. 병 안에 달달한 밤과 함께 커피 향이 채워집니다. 끓이는 조리법이니 알코올 성분은 남아있지 않아 아이와 먹기에도 그만입니다. 이렇게 깔루아는 제게 ‘제과재료’로 ‘음료 재료’로, ‘음식재료’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한 병을 구입하면 비울 때까지 만년쯤 걸리는, 그런 재료 말입니다.



어느 여름, 햇살이 쨍한 록 페스티벌에 갔습니다. 아이돌 음악만 듣던 딸이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해서 동행한 길이었습니다. 8월의 한강 공원에서 내리 꽂히는 해를 피할 뾰족한 수는 없습니다. 선크림과 선글라스만으로 ‘나는 무장했다’는 정신승리를 한 후, 밴드의 음악에 몸을 싣는 것이 그중 괜찮은 방법입니다. 정말 버티기 힘들면 차가운 맥주로 속을 식히면서 음악을 듣는 겁니다. 지긋지긋한 여름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계속 맥주를 마시는 저를 흘끔거리던 딸이 한참 후에 플라스틱 컵 하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제 딸은 술을 못 마십니다). 제가 보기엔 커피 우유에 얼음을 넣은 맹한 물처럼 보였는데, 마시는 딸의 표정은 꽤 만족스러워 보였습니다. 닭강정과 떡꼬치, 스테이크와 햄버거를 파는 가게 옆에 ‘칵테일’ 가게가 있었는데, 관심이 없던 저는 그냥 지나치던 곳이었습니다. 딸이 고른 것은 ‘깔루아 밀크’였는데, 페스티벌 분위기상 독한 술을 팔기도 그렇고, 원가 문제도 있고 해서 함유된 알코올의 양은 그야말로 ‘소량’이었습니다.




‘깔루아’가 칵테일의 베이스가 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저 제과나 음식의 ‘재료’가 아니고 엄연한 술의 한 종류라는 것을 말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 어떤 모습으로 만났느냐에 따라 우리는 상대에 대해 선입견을 갖게 됩니다. 친구로 만나 연인이 되거나, 거래처 직원으로 만나 친구가 되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 소개로 만나 연인이 되거나, 학교에서 친구가 되는 경우가 흔하죠. 과연 상대의 모습이 ‘내가 알고 있는 그것’뿐인지 한 번쯤 고민해야 하지는 않을까요? 제게는 제과 재료에 불과(?)했던 깔루아가 딸에게는 새롭게 만난 술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딸은 햇빛이 내리쬐는 잔디밭에 누워 깔루아 밀크를 마시며 음악을 즐겼습니다. 그 시간 이후 밴드 음악에도 관심을 보였고, 좋아하는 록커도 생겼습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서늘할 바람이 불면, 페스티벌의 흥은 정점으로 향해갑니다. 목이 쉬게 소리를 지르고, 크게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박자에 맞춰 발을 구르고 나면 또 한 번의 여름이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연극의 막과 막 사이 꺼지는 불처럼, 제게 한 여름 록 페스티벌은 시간의 흐름을 깨닫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평화로운 ‘사건’ 같은 것이었습니다.  


코로나의 창궐로 작년에도, 아마도 올해까지 록 페스티벌을 기대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많은 불편한 일 가운데서 드러내 놓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모두의 노력으로 언젠가는 평화로운 시간이 돌아올 겁니다. 그때가 되면 다시 내려 쬐는 햇빛을 무시한 채 신나는 록음악을 들으며 뜨거운 계절을 즐길 수 있겠지요.




브런치에 올리는 사진을 딸이 핸드폰으로 찍어주는데, 이번 깔루아 밀크는 자신의 몫이라며 벌써 신이 났습니다. 레시피는 간단합니다.


1.     잔에 얼음을 넣은 후 깔루아를 적당히 부어줍니다. 제가 마실 때는 1 소주잔 넣는데, 딸이 마실 거라 조금만 넣겠습니다.

2.     나머지 부분은 우유로 채워주세요.

3.     얼음을 너무 많이 넣지는 마세요. 페스티벌에서 제 딸이 들고 있던 것처럼 흐리멍덩하게 됩니다.

4.     휘휘 저어 주신 후, 즐겁게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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