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싸우고, 러닝하라!

러닝의 진짜 매력

by 임지원

남편은 출근, 막내는 등교. 난 아침 먹은 식탁을 치우고, 헬스장으로 내려와 신발장에 있는 러닝화를 꺼내

신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정수기 아주머니다. 아차차! 어제 아주머니랑 통화까지 하며 정한 약속을 깜박했다. 급히 신발을 벗고 다시 집으로 뛰어올라갔다. 잊을 만하면 이렇게 한 번씩 아차차!! 를 한다.

중년인 나이 탓도 있고, 원래 성향도 꼼꼼하지 못해 종종 이런 일은 벌어진다. 병원 예약 까먹은 것도 여러 번이다. 솔직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약속 깜박하는 아줌마가 무슨 사회악도 아니고, 당황할 거 까진 없는데, 이상하게 난 좀 당황한다. 직업병의 잔재인 듯하다.

과거 일했던 방송국은 뭘 깜박하면 목이 날아가는 곳이었다. 난 프리랜서 방송작가.

언제든 교체 가능한 인력이었으니 당연히 긴장이 높았다. 목 옆에 칼을 두고 일하는 기분이랄까?

이제 안 그래도 되는데, 아차차! 하는 순간을 맞닥뜨리면 마음에 서늘한 기운이 차오른다.

칼 날이 스치는 느낌 같기도 하고, 등에 구멍이 뻥 뚫리는 거 같기도 하다. 아무튼 좋은 느낌은 아니다.


그냥 걸어가도 되는데 왠지 뛴다. 그래봐야 줄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몇 분, 몇 초다.

이건 클라이언트 증후군에서 비롯된 건데, 정수기 아줌마를 내 클라이언트라 생각하고,

100% 이상 만족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폭발하는 증상이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다.

항상 이러는 건 아닌데, 가끔 이렇게 기가 안 펴진다. 마음이 오그라든다.


과거 내가 살아온 시간이 몸 안에 각인돼 있음을 느낄 때,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된 걸까? 속을 막 끓이면 남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또 시작이네, 임지원과 임지원의 싸움."


문 앞에서 날 기다리던 정수기 아주머니는 일정이 바쁜 날이었다며 조급한 마음을 드러냈지만

곧 강철 같은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셨다.


"어머, 애기엄마 살 빠졌네! 얼마나 뺐어요?"

"그래 보여요? 10kg 정도 뺐어요."

"세상에 그 힘든 걸... 잘했네!"


나 진짜 몸무게에 연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동하는 일상이 자리를 잡으니 자연스럽게 조금씩

감량이 이루어지고 있다. 몸무게 앞자리도 바뀌었다. 못 입던 옷을 입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직은 과체중 상태지만, 여기까지 온 게 어딘가? 운동하는 일상이 계속되고, 건강하게 먹는다면

머지않아 정상 체중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거다.

어느 날엔 갑자기 냉동실에 있는 콘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미칠 거 같다. 생각을 멈추고 호흡에 집중하며

체중계에 올라가 보면, 역시나 감량된 상태였다. 어떻게 알아챘을까?

몸은 참 똑똑하다. 이미 들켰으니 이건 저항 못한다. 운명을 받아들이듯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한다.

고단한 인생에 이런 맛있는 순간도 필요하다! 일단 먹고, 몸을 안심시킨 다음 운동을 하면서 다시

감량의 기회를 노린다. 다행히 요가와 러닝이 내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운동이 예전만큼 번잡스럽지도, 힘들지도 않다.

지난 일요일 아침,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창문을 열고, 거실을 서성대며 리모컨 같은 걸 제자리로

옮겨놓다가 문득, 잠깐 달릴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로 옷을 챙겨 입고 헬스장에 내려가 4.5km 러닝을 했다.

땀을 쏟고 나니 세상 꼴 보기 싫은 것도, 신경 쓸 일도 없이 완벽하게 상쾌했다.

그리고 아침 식탁을 준비하는데 이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아, 그게 또 신기했다. 예전엔 러닝을 하면 종일

나 러닝 했어! 러닝 했다고! 러닝을 했단 말이야! 하는 거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일상적이다.

이건 꽤나 낯선 느낌이다. 러닝머신만 내 생활권 안에 존재한다면 오래도록 운동하는 아줌마로 살아갈 수

있을 거 같다. 물론 조건이 하나 붙는다. 바로 안전. 안전하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러닝을 하기 전 발목을 충분히 돌리고, 무릎은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다.

거의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한다. 소중한 내 다리! 예쁜 다리가 아니라 오랜 세월 구박도 많이

받았는데, 요즘은 특별관리 대상이 됐다. 내 멘털을 관리하느라 업무가 과중하니 그럴 수밖에!


생각할수록 중년 이후 인생은 다리에 달렸다. 갑자기 어두운 마음이 몰려오고, 오래전 날 지배했던

여러 종류의 불안이 고지서를 들고 찾아온다. 갑자기 등에 구멍이 뻥 뚫리고, 서슬 퍼런 칼날이 날 베고 간다. 억울하다. 결국 불행해질 것 같다. 바닥에 주저앉은 날, 내가 바라본다.

임지원과 임지원이 싸우는 순간이다.

쉽사리 끝나지 않는 싸움이지만 다행히 끝은 있다. 싸움이 끝나면 다 부질없다 느껴지는데,

또 왠지 괜찮을 거 같다. 다시 힘을 내 러닝머신 위에 선다.

발목을 돌리고, 무릎을 어루만지며 오늘도 잘 부탁한다고 다정하게 말을 건다.

흥겨운 음악이 시작되면 바로 달릴 수 있다.

코어에 힘을 주고, 발바닥을 바닥에 밀착시켜 본다. 최대한 가볍게, 몸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공중으로 떠오른다고 상상하며 달린다. 처음엔 양팔의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않은 거 같기도 하고,

무릎 관절도 아직 준비가 안된 듯 뻑뻑하다. 경추의 각도까지 애매한 거 같아 이렇게 저렇게 위치를

조절하게 되는데, 시간이 흐르면 몸은 점점 자세를 잡고,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호흡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되면 시선을 고정하고 집중한다. 더 집중하면 과거의 나도 없고, 미래의 나도 없다.

이 순간 달리고 있는 현재의 나만이 생생한 상태. 난 이 순간이 정말 좋다.


러닝의 진짜 매력은 이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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