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 밖 달리기,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동안 나의 러닝은 헬스장에 있는 러닝머신 위에서만 이루어졌다. 러닝머신을 통해 측정됐고,
러닝머신의 LCD창에 나타난 숫자로 기록됐다. 러닝 머신 없는 러닝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나랑은 크게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러닝 머신 러닝'은 러닝 머신 위에 서서 간단히 준비운동을 하고, 신발끈도 완벽하게 세팅하는 걸로 시작된다. 중간에 마실 물과 땀을 닦을 수건도 러닝 머신 위 손에 닿는 곳에 비치해 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달리는 도중 나의 미진한 준비로 인해 러닝을 멈추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러닝 중간에 머신이 멈추면, 바로 다시 켤 수도 없다. 30초 정도 잠깐 대기한 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러닝머신이 다 그런 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음악과 물과 수건을 확실하게 세팅하고, 에어팟이 안정적으로 내 귀에 장착됐는지까지 확인하고 달리기 시작하면 목표량을 채울 때까지, 가끔 그 이상 멈추지 않고 달린다. 다른 운동도 그렇겠지만 러닝도 인내하며 지속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나의 모든 기량이 담긴 기록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기록이 보람이고, 보람은 운동의 지속에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일전에 청소해 주시는 이모님이 실수로 러닝머신의 전원을 끄는 일이 벌어졌다. 대걸레로 바닥 청소를 하다가 콘센트를 건드린 것이다. 이모님은 많이 당황하시며 달리던 분에게 사과를 했고, 그분은 바로 괜찮다고 웃으며 반응했지만, 표정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이 없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이 뻔한 소리를 왜 이렇게 길게 하고 있나?
사실 그동안 러닝 머신에서 멈추지 않고 달리는 행위에 대해 어떤 생각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고장 나면 관리실에서 고치는 것이고, 난 그냥 헬스장에 가서 사용하면 되는 어떤 것.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 당연한 것이 요즘 아주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러니까 러닝머신에서 '머신'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머신이 무엇인가? 일단 내 맘대로 간단히 정의를 내려보면, 손쉽게 하도록 돕는 것이다. 말하자면, 노트북은 글쓰기머신, 세탁기는 빨래머신, 건조기는 말리는 머신이다. 그러니까 러닝 머신은 러닝을 손쉽게 하도록 도와주는 머신인 것이다.
요즘 우리 막내는 일본애니메이션 '하이큐'에 푹 빠져 있다. 슬램덩크가 농구만화라면, 하이큐는 배구 만화다. 지난 1학기 체육시간에 배구 수업을 한 것도 영향을 미쳤는지, 해가 지면 배구를 하러 밖으로 나가자고 졸라댄다. 배구를 하러 나간다고 해서 경기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혼자 배구공을 던졌다, 쳤다, 받았다가, 굴러간 배구공을 가져와 다시 던지는 정도의 운동으로 보이는데, 아이는 그게 하이큐만화에 나오는 배구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란다. 기술 연마라... 머릿속에서는 하이큐 만화의 한 장면처럼 자신이 멋지게 스파이크에 성공하는 기분을 느끼는 모양이다. 배구를 하는 장소는 우리 아파트 근처 농구장 옆 족구장이다. 철망 울타리가 둘러싼 넓은 공간에 두 개의 족구장이 있다. 적어도 공이 철망 안에서 굴러다니니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한 것이다. 처음엔 내가 옆에서 공을 던져주기도 하고, 갖다 주기도 했지만, 아이는 뭔가 불편했는지 그냥 혼자 집중하겠다고 했다. 그래, 잘 됐다! 쉰을 넘긴 중년의 나다. 방학 중인 초등학생 늦둥이와 하루를 보내고, 저녁 먹은 설거지까지 마쳤다. 컨디션이 좋을 리 없다. 당연한 일이다. 불현듯 선선한 바람이 곁을 스쳐가기만 해도 한숨이 나온다.
가져간 캠핑용 간이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며 나도 모르게 나무야, 안녕!
누가 두고 갔나? 혼자 남겨진 낡은 축구공아, 안녕!
건너편 생활 체육시설 건물에 멈춘 시계에게도 안녕! 넌 왜 어제도 오늘도 아까도 지금도 7시 50분이니?
관공서에 전화라도 해서 널 좀 살려달라 말해볼까?
그러다가 이러고 있느니 차라리 움직이는 게 나을 거 같아,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네모난 철망 안을 무심하게 걷다가 음악을 추가했다. 음악이 시작되니 뛸 수도 있을 거 같아 한 번 뛰어보았다. 신발은 러닝화가 아니고 스케쳐스 고워크, 밑창이 키높이 구두급으로 높아 불편할까 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러닝 머신 러닝에만 익숙한 터라 내 의지로 달리는 이 속도가 적당한지 너무 빠른 건지 애매모호해 불안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내 의지로 간단히 조절할 수 있어 신기했다. 러닝 머신에서 적당한 속도를 찾아나에게 적용하는 것,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갑자기 훅 빨리 달려보기도 하고, 코너링을 할 땐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였다가 다시 직선 구간에선 다시 속도를 높였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까지 몇 바퀴를 도나 손가락으로 접어보니 여섯 바퀴다. 30분을 달렸으니 한 곡당 3분으로 가정하면, 그 네모난 족구장을 무려 60바퀴나 달린 것이다. 중간에 물도 못 마시고, 땀도 못 닦고, 냅다 30분을 달리고 간이 의자에 앉으니 땀이 비 오듯 흐르며 정신이 아득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모기들이 떼로 날아와 공격을 시작했다. 다음 날, 배구하러 갈 땐 좀 더 준비를 철저히 했다. 물도 더 많이 챙기고 양말도 스포츠 양말로 장착하고 스프레이형 모기기피제를 준비해 온몸에 분사했다. 그런데, 그날은 생각보다 뛰는 게 힘들다. 뛰기 싫다! 첫날은 호기심으로 러닝 후 마의 10분 구간을 버틴 모양이다. 하지만 그날은 좀 더 피곤한 하루였던가? 갑자기 다리도 무겁고, 몸도 무겁고 그냥 간이의자에 앉아 얼음물을 마시고 휴대폰 검색이나 하며 킬링타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나를 장악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만약 지금 러닝 머신 위였다면 멈추는 것이 귀찮아서라도 그냥 계속 달렸을 텐데!
멈추는 것보다 달리는 것이 용이한 상태, 러닝 머신은 그걸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일전에 내가
세운 기록, 멈추지 않고 달린 6km가 온전히 내 체력과 호흡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머신 없는 러닝'을 나는 '자기 주도적 러닝'이라 이름 붙여 보았다. 문득 공부하는 아이에게 별거 아니라는 듯 '자기 주도적 학습'을 이야기한 게 부끄럽다. 아이가 공부를 하다 딴생각을 하고 문제집 여백에 그림을 그릴 때, 아니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잔소리를 했는데, 그건 생각보다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맨 땅을 달리다가 멈추는 것, 그게 어렵나? 계속 달리는 게 훨씬 어렵다! 문제집을 푸는 건 의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백에 그림 그리는 건 달리다가 멈추고 싶어지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였던 것이다!
더위는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막내의 배구 사랑도 한동안 지속될 듯하다.
게다가 덕질이 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족구장과 농구장에 두세 개 조명이 켜져 있다고는 해도 근처는 온통 숲이고, 해가 지면 그냥 검정인데, 아이 혼자 내보낼 수도 없고, 한동안 족구장 달리기를 종종 해야 할 거 같아, 나도 방법을 찾았다.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줄 새로운 머신, 내가 찾은 건 휴대폰 앱이다. 러닝에 실패한 그날 이후, 난 휴대폰을 손에 쥐고 달린다. 휴대폰에 내가 달린 거리가 얼마인지, 몇 걸음을 걸었는지 기록이 남는다. 러닝머신만큼 내 몸에 직접적인 영향은 주지 않지만, 그래도 내 기록이 숫자로 남는다고 생각하니 훨씬 집중을 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머신의 노예'가 된 것인가?
지난 주말, 남편과 막내와 함께 동네에 새로 생긴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데,
커뮤니티 헬스장 창문으로 러닝머신에서 달리는 나의 동지(러닝 머신에서 달리면 다 내 동지다!)들이 보였다.
족구장이 아닌 저기, 러닝 머신에서 달리고 싶다는 열망이 펄펄 끓어올랐다.
하지만, 결국 족구장에서 휴대폰을 손에 쥐고 26분을 달렸다. 빨리 달렸다가 좀 느리게 달렸다가, HOT의 '캔디'가 나올 땐 아직도 기억나는 몇 동작 춤도 추면서, 검은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공기도, 옆 농구장 어딘가에서 솔솔 불어오는 담배연기까지 맡으며 자유롭게 달려보았다.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배구공과 놀고 있는 내 아이 주변을 빙빙 도니, 왠지 어린양을 지키는 목동이 된 기분이 든다. 솔직히 아직 자기 주도적 족구장 달리기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 정도 실력으로 러닝을 논했다니... 살짝 부끄러운 마음도 든다.
운동을 시작하려는 당신에게는 러닝 머신을 추천한다. 러닝 머신으로 달리는 것이 의지를 갖고 땅을 달리는 것보다 훨씬 쉽다. 쉽게 시작해서 점점 어려운 단계로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문제집도 기본 먼저 풀고 심화로 넘어간다. 멈추는 것보다 달리는 것이 훨씬 용이한 상태, 그건 정말 소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