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나오는 강원도 태백은 한때 광부들의 성지. 아버지도 젊을 때 태백에서 석탄을 캔 적이 있다고 들은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지역 아이들은 한번 울기 시작하면 자기 몸보다 크게 울어댄다고 시인은 말한다
왜 아이들이 그렇게 우는 걸까
아침부터 취한 채로 광질에 들어가는 사내들이 술먹고 집안에 주정이라도 부려서일까?
물론 답은 뻔한 그런 단순한 이야기는 아니다. 술이라도 먹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광부이자 아버지이자 이웃들의 삶이태백의 갱도가 무너지면 순식간에 끝나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갱도가 무너지면 광부들이 산소가 없어서 질식사하거나 굶다 못해 아사하리라 상상하지만 현실은 그보다 좀 더 비극적이고 판타지스럽다. 광부들의 주된 사인은 익사, 갱도는터진 수맥에 물에 잠겨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이러한 재난은 사실 예외적인 게 아니라 광부에게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상...
이러니 남겨진 아이들은 장마보다도 세차게 울지 않을 수가 없다. 태백은 여름에나 겨울에나 갑자기 그렇지만 주기적으로 장마철이라는 재난이 찾아온다는 슬픈 진실 ... 하지만 시인은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다고 편지를 새로 쓴다.이 비극적인 장마를 왜 시인은 함께 보겠다고 하는 걸까? 혹시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 엔딩 같은 마음은 아닐까
박준처럼 비를 주요 소재로 다루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날씨의 아이, 맨주먹으로 도쿄를 가출 내지 상경한 남주 호다카가 뭔가 신비한 여주 히나를 만나서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린다는 고전적인 보이 밋츠 걸의 연애 서사를 보여준다. 그런데 여주는 단순히 신비해 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로 신비한 힘을 가졌다. 하늘에 기도를 하면 비 오던 하늘이 갑자기 맑아지는, 상식을 초월해 버리는맑음소녀의 능력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이 능력으로 여주는 남주와 함께 벼룩시장을 맑게 해주는 알바부터 시작해서 매일매일 날씨를 맑게 하는 100퍼센트 맑음소녀의 의뢰를 사방팔방에서 받게 된다. 사람은 하늘이 맑다는 이유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니까 다들 즐거워지고 행복한 능력이 아닐까? 하지만 아동용 동화도 아니고 그런 초능력이 아무 대가도 없을리는 없다. 맑아지는 능력을 사용할수록 여주 히나의 몸은 점점 투명해져간다... 그러나 여주 히나가 그 능력을 쓰지 않으려고 하니 이 이상한 세상의 장마는 점점 더 심해진다. 마침내 도쿄 전체가 침수되기 직전, 비를 멈추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여 하늘로 사라진다.
모두가 기분좋은 맑은 세상을 위해 날씨의 아이 히나는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걸까? 적어도 남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기적적으로 하늘에 올라가서 희생하려는 히나를 도로 땅으로 데려온다. 그러자 이제 정말로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장대비가 매일매일 내리고, 3년 내내 비가 내린 도쿄는 마치 바다 위의 건물들이 떠있고 수상버스가 다니는 수중도시가 돼버린다...
사실 날씨는 히나 이전에 인간 입장에선 이미 항상 미쳐있었다. 사시사철 매일 비가 와버리면 그 어떤 인간과 사회의 역량으로도 해결이 어렵다. 그걸 한 소녀가 희생해서 막아달라는 건 애초에 너무나 야만적인 폭력 그 자체가 아닐까. 그런 희생을 강요하는 폭력을 멈추는 건 사랑 이전에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걸 정당화하는 건 공리주의적 이득을 중시하는, 아니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전체주의적인 어른들의 논리일 뿐, 순수한 중학생 나이인 남주와 여주 아이들의 마음과 윤리로는 결코 납득할 수 없는 게 자연스럽다.
남주는 비에 잠겨버리는 세상보다 푸른 하늘보다 여주 히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며 괜찮다고, 세상이 이렇더라도 우리는 어떻게든 괜찮다고 서로 다독이며 살아나갈 거라고 말한다.그리고 이 부분에서 박준과 신카이 마코토는 우연찮게 마주치는 게 아닐까.
장마 시에서 광부가 일을 계속하는 한 갱도는 언젠가 또 막힐 것이고, 아사든 익사든 희생은 또 일어날 것이고 장마처럼 우는 비극의 아이들은 또 생겨날 것이다.
그치만 시인은 그런 당연한, 필연적인 진실이 적혀있는 종이를 구겨버리고 장마를 우리가 함께 보자고 제안하는 편지를 새로 쓴다. 이는 그저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할 뿐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이런 잔혹하고 비극적인 아이들이 우는 장마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함께 울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함께 있어주겠다고 하는 게 아닐까.
마치 날씨의 아이 엔딩에서 세계 같은 건 처음부터 미쳐있었지만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고, 그저 서로가 서로에게 함께하니까 이런 미친 세상에서도 위로가 되듯이,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노래가 나오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