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웬만한 동남아 휴양지는 다 가본 동남아 덕후다. 동남아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상당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망고다. 이번 방콕 여행에서도 가장 기대했던 건 바로 태국 망고였다. 망고,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여….
내게 망고 알러지가 처음 발현된 것은 2020년 봄 필리핀 보라카이에서였다. 이상하게 입술 주변이 퉁퉁 붓고 수포가 생기더니, 진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급기야 왼쪽 눈까지 눈탱이 밤탱이가 되었다. 그때 나는 단순히 필리핀 물이 나한테 더럽게 안 맞는구나 싶었다. 혹은 그 시기에 한창 야간교대를 돌면서 무리한 스케줄을 수행하던 중이어서, 몸의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긴 탓인 줄 알았다. 병원 가서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서야 가라앉았고 그렇게 코로나 동안 해외를 못 가면서 그때의 해프닝은 잊혔다.
다시 망고 알러지가 나타난 것은 2022년 가을 필리핀 세부를 다녀온 뒤였다. 2년 전 보라카이 때와 똑같은 두드러기가 입술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나는 필리핀 물이나 헤르페스를 의심했지만 생수로 씻으며 항바이러스제를 사서 발라봐도 더 심해지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귀국 항공기 60시간 지연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면서 세부에서 아주 최악의 컨디션으로 보내다가 간신히 한국에 돌아와서 병원에 갔다. 공교롭게도, 계획하지 않았는데 보라카이 때와 똑같은 병원 똑같은 의사 선생님께 진료를 보게 되었다. 선생님은 2년 전에도 내가 같은 증상으로 방문했었다며 그때와 지금의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두 번 다 필리핀을 다녀와서 스트레스와 컨디션 난조에 시달렸을 때라고 진술했다. 그러자 갑자기 의사 선생님이 책상을 쾅, 내리치면서 외치셨다. “망고!!! 혹시 망고 먹었어요???” 그때 망고!를 외치던 의사 선생님은 거의 유레카!를 외치던 아르키메데스의 현신이었다. (물론 필리핀에서도 망고 오지게 먹었었다.)
나는 다른 원인이 있을 거라 믿으며 끝내 망고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었다. 제주도에서 망고를 먹었을 때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필리핀 망고 종에 한해서만 그럴 수도 있다며 망고 알러지라는 확신을 가지고 선생님이 처방해 준 주사와 약을 통해 증상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빼박이었다. 나는 망고 알러지라는 진단에 마치 불치병을 선고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인생에.. 이제 망고가 없다고…? 삶을 사는 이유 중 하나가 사라진 것 같았다(물론 그래도 수두룩 빽빽하게 다른 이유들이 남아있긴 하겠지만). 선생님은 알러지 검사를 받아보길 권하셨고, 나는 정말 땅땅 선고받고 싶지 않은 기분에 검사를 미뤘다. 아직까지는 심증만 있을 뿐이니까! 그러다 어쩌다 원인 모를 알러지로(이때는 정말 망고가 원인이 아니었다) 응급실까지 다녀온 뒤에서야 검사를 받았다.
병원 측의 실수와 진단을 받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이 합쳐져서 망고 알러지 검사 결과는 1년이 지나서 이번에 방콕을 오게 되면서야 확인했다. 그 사이에 나는 다낭과 대만을 다녀왔고, 그간 망고는 눈치 보며 조심스레 먹다가 말다가 했다. 내 몸이 망고에 익숙해지길 바라며 틈틈이 말린 망고도 챙겨 먹었다. 그리고 1년 만에 확인한 알러지 검사 결과는, 놀랍게도 음성이었다!!! 그 결과를 확인하고는 나는 그동안 망고 잃은 나를 가엾게 여기던 친구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래, 아마 나는 알러지가 있더라도 필리핀 망고에 한해서만 있었을 거야! 그 검사 결과는 내게 망고를 먹어도 된다는 허락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안일한 확신을 업고 항히스타민제 하나만 챙긴 채 태국에 와서 폭주하듯 망고를 먹었고, 그 결과 난생처음으로 해외에서 병원에 오게 되었다….
수영복+물총+퉁퉁 부은 입술로 나타난 수상한 외국인의 등장에 간호사들이 의아해했다.
간호사 선생님들과 의사 선생님이 증상이 언제부터 나타났으며, 왜 망고 알러지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어보셨다. 나는 전에도 망고를 먹고 이런 적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망고는 방콕에 와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었고 심지어 씨에 붙은 과육까지 야무지게 (내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처먹었다고…. 영어로 5번쯤 말하는데 수치사 할 뻔했다.
사실 아무리 검사 결과가 음성이어도 의심이 가면 피했어야 한다고 주변에서는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망고 없이 동남아 여행이 무슨 말일까. 그리고 망고 없는 내 삶은 쪼금 덜 행복할 것 같다. 이번 방콕 여행에서도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정말 맛있는 망고를 발견해서 잔뜩 샀을 때였다. 고양이 알러지가 있음에도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처럼, 망고 알러지가 있음에도 망고와 공존할 수는 없는 걸까? 세상의 모든 것들은 기브 앤 테이크라고 하는데, 내가 망고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세상이 나한테 더 큰 대가를 요구하는 것일까?
앞으로 망고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은 차치하고, 적어도 이번 여행에서는 이 망고 알러지로 인한 해프닝조차 재밌긴 했다. 어차피 더워서 낮에는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병원을 가야 한다는 미션이 생겼다. 그동안 친구랑 있을 때는 못 탔던 그랩 바이크를 탔고, 오토바이 뒤에 타서 도로 위에서 물총을 쏘는 경험도 해보았다.
또 하나 새롭게 느낀 게, 생각보다 내가 해외에서 병원에 가고 영어로 소통하는 것 자체에 별 두려움과 어려움이 없었다는 거다. 앞으로 있을 발리한달살기에 대해서도 낙관이 생겼다. 발리를 위해 들었던 여행자 보험을 태국에서 벌써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ㅎ
아무튼, 또 하나의 경험을 했다는 것, 그리고 검사 결과와 별개로 확실히 내 알러지를 확인했다면 측면에서 적어도 이번 여행에서는 망고를 먹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 최대한 많이 경험하고 느끼자! 그러려고 여기 온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