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소설] 가족
주란이 1년 넘게 중매를 보러 다니던 어느 겨울이었다. 12월 24일 목요일 크리스마스이브, 세 번째 중매 남자인 하성재를 만난 지 6개월이 됐을 때다. 그는 주란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주란은 결혼식 같은 건 할 수 없는 형편이라며 가정사를 털어놓았다. 그는 괜찮다며 주란의 사정을 이해해 주었다. 주란은 성재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였다. 민정은 그가 주란보다 13살이나 더 많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란은 부모님의 이혼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아마도 그래서 나이가 많은 남편감을 고른 것일지 모른다고 민정은 생각했다.
주란에게는 다른 친구나 친척이 없었다. 그래서 결혼식을 생략하고 새해부터 성재와 집을 합치기로 했다. 주란은 결혼식 대신 친구인 민정을 초대해, 성재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성재가 원주에 살기 때문에 셋은 오산터미널 앞 한 중국집에서 만났다.
성재는 탕수육과 튀김만두를 시킨 뒤 고량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자 그는 고량주 한 병을 맥주잔에 따라서 단숨에 들이켜더니, 말없이 앉아서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서먹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민정이 먼저 말을 걸었다.
“지금 어떤 일을 하세요?”
“주유소에서 일합니다.”
주유소에서 일한다면 밤에도 근무한다는 뜻. 주란이 집에 혼자 있을 시간이 많겠구나, 민정은 생각했다.
“정규직이라서 편한 일입니다. 주로 사무실에서 서류 정리를 하는 일을 하죠.”
성재가 민정의 생각을 읽은 듯 덧붙였다.
중국집 벽에 걸린 시계를 자꾸 쳐다보던 그는 곧 내려가야 하다면서 먼저 일어났다. 민정은 그와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민정과 주란은 집으로 돌아와 함께 짐을 쌌다. 여행 가방 두 개에 주란의 짐을 나눠 담고 나서, 두 사람은 평소 안 마시던 맥주를 마셨다. 주란의 볼이 빨개졌다.
“민정아, 나한테는 여기가 친정집이었어. 넌 나한테 가족 같은 존재야.”
“가족?”
“부모님이 나를 낳아서 가족이 됐지만, 내가 그들을 가족으로 선택하지는 않았잖아. 내가 선택한 첫 번째 가족은 너야. 그리고 두 번째 가족은 성재 씨야.”
고등학교 때 주란이 구원해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민정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우린 가족이 맞아, 그런 것 같아, 민정은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 민정은 일진 학생과 어울렸다. 부모님의 불화로, 틈만 나면 가출했고, 학교에서도 항상 겉돌았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민정은 일진 아이들과 함께 주란에게 몹쓸 짓을 했다. 방학 내내 작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받은 주란의 월급을 빼앗았다. 가게 주인은 이 사건을 학교에 신고했다. 민정을 제외한 다른 친구들은 잘못을 부인했고 주란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다. 오직 민정만이 주란에게 사과했고 잘못을 시인했다. 주란은 사과를 받아주었고, 학교는 민정에게 정학 대신 봉사 처분을 했다. 다른 친구들은 정학당했지만 민정은 학교에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학급 친구들의 손가락질과 따돌림을 감내해야 했다. 그때 피해자인 주란은 오히려 가해자인 민정을 친구로 받아주었다. 그렇게 민정은 주란과 세상에 하나뿐인 단짝이 돼 학창 시절을 보냈다.
혈육만 가족이라고 할 수는 없지, 민정은 생각했다. 사춘기 시절, 방황하는 자신을 잡아준 사람도 혈육이 아니라 바로 친구인 주란이었으니까.
“여긴 친정집. 나는 언니! 앞으로 박주란은 나를 언니라고 부르도록 하시오.”
민정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을 글썽거리던 주란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번 구정에 일본 여행 가는데, 결혼선물로 뭘 받고 싶어?”
“음. 일본은 도자기가 유명하니까, 찻잔이 좋겠어. 언니.”
둘은 아이처럼 서로 새끼손가락을 걸어 영원한 가족이 되자 약속했다.
다음 날 함께 아침 식사를 한 후, 민정은 주란을 오산터미널까지 배웅했다. 연말을 앞두고 터미널은 귀향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짐 가방을 고속버스 짐칸에 넣은 후, 작은 백을 멘 채 민정을 쳐다보는 주란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민정은 주란을 꼭 안아주었다.
며칠 후, 신혼집이 있는 원주로 내려간 주란에게서 연락이 왔다.
“두 번째 가족……, 내가 잘 선택한 걸까?”
주란의 목소리가 왠지 슬펐다. 스스로 선택한 가족에게 간다면서 설레던 주란이 아니었다.
“네가 선택한 거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잖아.”
주란은 다시 올라오고 싶다고 했고, 민정은 며칠 생각해보고 결정하면 어떠냐고 다독였다. 좀 더 길게 통화하고 싶었지만, 일본어 강의 때문에 전화를 끊어야 했다.
민정은 쉬는 시간에 주란에게 바로 연락했다.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 혹시라도 주란에게서 전화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종일 휴대폰을 쳐다봤다. 퇴근 후에 하성재에게 연락했다. 그는 업무 중이라서 통화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민정은 자신의 소식을 전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주란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달력을 봤다. 주란이 결혼한 지 한 달이 다 돼가고 있었다.
주란아, 통 연락이 안 되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지난번에 네가 전화했을 때
수업 있어서 통화를 길게 못 했어.
섭섭하게 해서 미안해.
괜히 걱정시키지 말고 전화 좀 받아.
내일 일본 여행 가는 거 알지?
이 문자 보면 연락 부탁해.
일본 여행 전날 밤 민정은 주란에게 긴 문자를 보냈다. 다음 날 비행기 안에서 휴대폰을 끄기 전에도 민정은 무의식적으로 문자를 확인했다. 주란은 답장이 없었다. 귀국하면 즉시 주란을 찾아가리라, 민정은 결심했다.
글/ 사진: 박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