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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Dec 02. 2019

소년과 백일장


어릴 적부터 백일장에는 젬병이었다. 유난히 감성적이던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 있었다. 그는 내가 쓴 '메밀꽃 필 무렵' 독후감을 읽고서 나를 백일장에 내보내기로 결심했다. 사실 그 독후감은 인터넷에 올라온 여러 개의 독후감을 짜깁기한 것이었는데, 선생님의 감동한 얼굴 앞에서는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백일장은 소풍처럼 야외에서 했다. 기다란 흰 종이와 주제를 주고서, 시간 내에 자유롭게 써오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런 방식의 글쓰기에 약했다. 나는 일찍부터 컴퓨터를 다루었다. 그래서 글을 그림 그리듯 썼다. 일단 첫 문장과 끝 문장을 적고, 그 사이를 산발적으로 채워나가는 식이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거나 순서를 바꾸거나 끼워 넣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한 숨에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내게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게다가 백일장에서 주어지는 주제는 (당시 나에겐) 모두 바보 같았다. 이를테면 <'신발'을 주제로 산문을 쓰시오>라는 식이었다. 도대체 신발로 어떤 글을 써야 할까. 나는 흙이 묻어 꼬질꼬질한 나의 신발을 바라보다가 시간의 절반을 써버렸다. 결국 내가 써낸 첫 문장은 '신발을 벗자'였다. 우리는 왜 답답하게 양말도 신고, 신발도 신고 다니는 걸까. 맨발로 이 촉촉한 흙길을 걸으면 기분이 정말 좋을 텐데. 발가락도 요렇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 텐데. 이런 마구잡이식으로 글을 써내리다가 시간이 끝나가는 바람에, 마지막 문장도 '신발을 벗자'로 끝내고 제출해버렸다. '신발'이 주제인 백일장에서 신발을 벗자고 말한 나의 산문은 '참가상'정도에서 그쳤다. 다른 백일장도 마찬가지였다.


국어 선생님은 나의 백일장 성적에 의아해하면서도 나에 대한 믿음이 있으셨는지, 나를 계속해서 백일장에 내보냈다. 나는 백일장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자기 주관이 뚜렷한 친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백일장 흰색 종이를 보면서,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없구나.'라고 선생님 몰래 생각하곤 했다. 그런 내가 지금은 매일마다 글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으니 인생이란 게 참으로 아이러니다.


'너는 글쓰기를 좋아하게 될 거야. 네가 쓴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거야.'

백일장 종이를 받아 고민하는 녀석에게 이 말을 전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가만히 웃을까, 안심할까, 아니면 의아하다는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시금 종이 속으로 얼굴을 파묻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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