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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공포증.. 겪고 보니 별 거 맞더라

by 기사

내 비행기 공포증은 유럽 여행을 가는 그 비행기에서 시작되었다. 평소 3~5시간 정도의 비행기를 많이 타 본 나였기에 이번 비행기도 당연히 별일 없을 줄 알았다. 12시간 비행은 지루할 것이 뻔했기에 탑승 후 승무원한테 작은 와인 한 병을 부탁했다. 스파이더맨 영화를 보며 작은 와인 한 병을 깔끔하게 비웠고 비행기를 좀 보다가 그대로 잠에 들었다. 대략 7시간 정도? 자다가 도중에 깼는데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고, 심장은 쿵쾅쿵쾅 거리며 세상이 도는 것이 아닌가? 술 마시고 난 후에 세상이 아래에서 위로 돈다면 이 불안증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상이 돌았다.

bokeh-2590658_1920.jpg 마치 안경을 안 낀 것처럼, 블러 처리를 넣은 것처럼 세상이 흐려진다.


처음 이 증상을 느꼈을 때는 그저 '왜 이러지?' 정도만 느끼고 억지로 잠을 청했었다. 유럽 여행에도 술을 마시면 가끔씩 증상이 나타나기는 했었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날 전까지는 별다른 큰 공포증 없이 여러 추억을 많이 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유럽 여행이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왔다. 집으로 가는 날 아침, 30년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악몽 중 하나를 꾸게 된다. 비행기를 타는 꿈이었는데 꿈속에서의 내가 비행기는 무섭다며 소리를 지르는 꿈이었다. 3류 배우가 악몽 꾸고 일어나는 장면과 비슷한 느낌으로 잠을 깼을 땐 단 한 가지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 나 비행기 공포증에 걸린 거구나... X 됐다.'


비행기 공포증에 대항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것은 잠이었다. 수면제를 원했으나 그런 위험한 약은 의사의 소견 없이는 구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약국에 가서 수면을 도와주는 멜라토닌이 들어간 약을 구매한 후 공항으로 출발했다. 너무나도 무서웠기에 비행기를 타기 전 이 공포증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는 흔히 잔돈이라고 불리는 동전들을 모두 기부함에 넣으면서 비행기 공포증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과 안 들어주셨다 멜라토닌 약을 먹는 것 한 알로는 턱도 없었다, 마지막이 노래 듣기였다. 노래는 주로 테일즈위버라는 게임에 있는 노래들을 들으며 공포증을 버텼다. 부드럽고 따뜻한 음색들의 노래라 그런지 마음을 안정시켜주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원래 복도의 자리였지만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자꾸 나를 깨우길래 양해를 구해 창가 쪽과 자리를 바꾸었다. 그 뒤로는 수면의 연속이었다. 자다가 깨면 멜라토닌을 먹고 다시 잠을 청하고, 또 깨면 또 먹고, 또 깨면 또 먹었다. 비행기는 기내식이 중요하건만 피 같은 기내식마저 기피하고 잠만 잤다. 마지막으로 깼을 때는 45분 정도 남았길래 최대한 노래를 들으면서 버텼다. 지옥 같은 약 12시간의 비행이 끝나고 나는 이제 공포증과는 영원한 작별인 줄 알았다. 다만 한 번 경험하게 된 공포증은 그렇게 쉽게는 없어지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공포가 아무 이유 없이 내게 찾아오기 시작했고 나는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행복해지는 방법과 덜 불행해지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평생 못 탈 것 같던 비행기도 이제는 30분? 정도라면 탈 수 있을 것 같다. 증상이 심했을 때는 약을 먹었고 증상을 어느 정도 완화시킨 후에는 행복 찾기와 불안 흘리기를 하며 불안증을 수용하는 그릇을 작게나마 키웠다. 당장 비행기를 타는 게 아니라면 운동과 행복 찾기를 통해 불안을 수용하는 그릇을 키우고 당장 비행기를 타야 되는 상황이라면 불안 흘리기를 비행기 시간만큼 지속하면 된다. 분명하게,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수준이다.


행복 찾기 : https://brunch.co.kr/@zqrd2960/4

불안 흘리기 : https://brunch.co.kr/@zqrd296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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