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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회피와 보류를 구분하자

by 이다한



회피와 보류는 모두 ‘지금 하지 않음’이라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그 의도와 태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회피는 직면을 피하는 것이고, 보류는 직면을 준비하는 것이다. 전자는 도망이고, 후자는 유예다.


회피는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외면하는 것이다. 문제를 보면 피하고, 감정을 느끼면 눌러버린다. 마주치면 불편하니까, 아예 피하고 지워버리려 한다. 회피는 결국 문제를 키우고, 관계를 소모시킨다.


반면 보류는 인식하고도 잠시 멈추는 것이다. 지금은 말하지 않겠지만, 나중엔 말할 것이다. 지금은 결정하지 않겠지만, 고민은 계속하고 있다. 보류는 잠재적인 책임의 연장이고, 회피는 그 책임 자체를 끊어내는 행동이다.


회피는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하고, 보류는 흔적을 기록해둔다. 회피하는 사람은 자신조차도 문제를 외면해버려서 나중엔 무엇을 피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보류하는 사람은 문제를 기억해두고, 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꺼내려고 한다.


우리는 종종 회피를 보류처럼 포장한다. “아직 생각 중이야.”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런 말이 계속 반복되기만 하고, 결국 아무 말도 없어진다면 그건 보류가 아니라 회피다.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정직할 필요가 있다.


보류는 시간을 확보하는 지혜이고, 회피는 시간을 낭비하는 습관이다. 무엇을 미루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언젠가 마주할 대상인지 아니면 영영 피하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관계도, 나 자신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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