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듣고 싶었던 말, "그럴 수도 있지."

끌어당김의 법칙

by 밝을 여름


"8시 30분 전에는 나가야 될 거야. 빨리 준비하자."


오늘 우리 집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매사에 시간 개념이 확실한 남편은 혼자서 마음이 조급하다. 나도 남편 성격을 알기에 서둘러 아이들 옷들을 입히고 기저귀 가방, 아이들 마실 물까지 잊지 않고 챙긴다.


오늘 우리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 집에서 꽤 먼 거리를 이동해야 되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서두른다. 요즘 들어 부쩍 차만 타면 차멀미를 하는 아들에게 멀미약을 먹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주차장에 도착해 아이들 한 명씩 카시트에 앉혀서 벨트를 채우니 아들은 벌써부터 가기 싫은 티를 내며 한숨만 푹푹 내쉰다. 딸도 카시트에 앉기 싫다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울고 불고 난리다. 하지만 어쩔 수 없기에,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 수없기에, 할 수 없이 나는 비장의 무기 사탕을 하나씩 꺼내 아이들 손에 쥐어준다. 그제야 아이들은 잠잠해진다.


오늘이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날이어서 그런지, 남편은 오늘따라 유독 더 말이 없다.

그렇게 아침이라 확 뚫린 고속도로를 두 시간여 달리고 달려서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이들과 남편은 차에서 기다리고 나만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날 저녁부터 남편이 여러 번 반복해서 얘기한 준비물도 잊지 않고 챙겼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도 꽤 오래 대기했다. 유난히 추웠던 오늘 날씨, 서있던 자리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왔다 갔다 하니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그렇게 안내받으며 자리에 앉으니 직원분이 갖고 온 준비물을 달라고 했다. 내가 건네준 준비물을 직원분이 보더니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면서 오늘 필요한 준비물을 내가 잘못 가져왔다고 얘기했다.


순간 어질어질하면서 머리가 띵해졌다. 그때 내 패딩점퍼 호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소리가 들렸다. 직감적으로 남편임을 알 있었다. 애써 모른척하고 싶지만, 남편은 끊을 생각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난 멍한 상태로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챙긴 준비물 잘못 가지고 왔다네. 어떡하지?"


"어???... 휴... 참... 휴... 휴..."


남편은 어이가 없어서 계속 한숨만 쉬다 전화를 끊었다. 난 이미 멘붕이 온 상태라, 직원분이 뭐라고 뭐라고 얘기하는데 아무 얘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음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들은 후, 난 정신없이 밖으로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싶지만 서둘러 남편과 아이가 있는 차로 이동했다.

차에 도착하니 남편은 얼굴이 굳은 채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


'바보같이 왜 그랬을까.'

'뭐에 씌었었나.'

'분명히 잘 챙긴다고 여러 번 확인했었는데...'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내가 왜 그랬지?'


이 중요한 순간에 초를 치다니,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한숨만 나왔다. 남편한테 미안하고,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자책하고, 한숨 한번 쉬고.

자책하고, 한숨 한번 쉬고.


답답하 우울해지니 숨쉬기도 힘들어졌다. 차 타고 오는 내내 그렇게 자책했다. 그러면서도 그 와중에 '도대체 얼마나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길래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나.' 하고 철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 나는 남편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살면서 내가 먼저 남편에게 사과할 일은 거의 없어서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 일만큼은 내가 백번 잘못했다.


"여보, 미안... 이번에는 내가 진짜 잘못했네."


"............."


남편은 나의 사과에도 묵묵부답이다. 얼핏 룸미러를 통해서 힐끔 보니 얼굴 표정은 그리 나쁜 것 같지 않은데 사람 마음 불편하게,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렇게 우리는 집에 와서도 서로 말 한번 안 섞고 각자 할 일만 했다. 조금 있으니 남편은 잠시 어디 갔다 온다고 말하고는 집을 나갔다.


남편이 나가고 나는 더 생각이 많아졌다.

물론 이번 일은 내가 생각해도 100% 내 잘못이다. 인정한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으로 내가 사과를 했으면, 넓은 마음으로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한마디만 해줬으면 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입장 바꿔 남편이 그랬다면 나는 절대 원망하지 않았을 거다. 난 '그럴 수도 있지.'하고 생각했을 거다. 지금까지 난 남편이 어떤 실수를 해도 비난하거나 원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나와는 반대로 본인 실수는 그럴 수 있다고 넘겨버리면서 내 실수는 꼭 한마디 거들고 지나갔다. 아들이 어렸을 때 다 같이 있는 공간에서 아이가 다치면 나를 위로하고 다독여주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원망했었다. 자기 자신도 같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나에게 모든 화살을 돌렸다. 오죽하면 자기 자신한테는 굉장히 관대하면서 나에게는 왜 이렇게 야박하냐고 말했을 정도이다. 이런저런 예전 일들까지 생각이 나니 조금은 아주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럴 수도 있지.' 이 말 한마디만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그때 남편이 집에 들어왔다. 남편과 눈을 마주치진 않았지만 아이들 대하는 목소리가 한결 밝아지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남편은 여전히 시무룩해져 있는 나에게로 곧장 다가와서는 옅은 미소를 띠며 내 귀에 대고 한마디 했다.


"그럴 수도 있지."


... 뭐야? 이 사람? 내 마음속 얘기를 들은 건가?


처음이었다. 남편의 이런 반응은...

연애 때부터 '내편' 좀 들어달라고 싸울 때마다 고래고래 소리쳤었는데, 또 결혼해서는 남편은 '남의 편'이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남편이 나를 비난하지 않고 위로해줬다.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말에, 게다가 내가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했던 말을 남편에게 듣는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쩜 매일이 평범한 날이 없다. 항상 무슨 일이 생기고 그 속에서 느끼는 바가 많아진다. 예전에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입버릇처럼 자주 말했었는데, 요즘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매일 에피소드가 꼭 생긴다.

인생 참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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