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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22. 2020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

문장채집 - 이상 단편선

11월부터 청소년들과 소설을 읽고 있다. 3주간 이상의 소설을 읽었다. 사실 별 이유는 없었다. 한 번쯤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12월 12일'을 펼치면서 걱정이 많았다. 이 난해한 소설을 읽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나.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천재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울을 체화한, 불행한 영혼임은 잘 알겠다.


나는 어디까지든지 내 방이 - 집이 아니다. 집은 없다 - 마음에 들었다. 방 안의 기온은 내 체온을 위하여 쾌적하였고 방 안의 침침한 정도가 또한 내 안력을 위하여 쾌적하였다. 나는 내 방 이상의 서늘한 방도 또 따뜻한 방도 희망하지는 않았다. 이 이상으로 밝거나 이 이상으로 아늑한 방을 원하지 않았다. 내 방은 나 하나를 위하여 요만한 정도를 꾸준히 지키는 것 같아 늘 내 방이 감사하였고 나는 또 이런 방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아서 즐거웠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하는 것을 계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행복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다고 불행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그날 그날을 그저 까닭 없이 펀둥펀둥 게으르고만 있으면 만사는 그만이었던 것이다.

내 몸과 마음에 옷처럼 잘 맞는 방 속에서 뒹굴면서 축 처져 있는 것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가 좋았다.

- <날개> (이상 단편선 272쪽)


절말 그럴 때가 있다. '쾌적한' 방 안에 있고만 싶을 때가. '침침한 정도'라는 표현에 피식 웃고 말았다. 밝고 깨끗하면 안 된다. 왜? 눈이 부시니까. 지나친 정돈과 청결은 '쾌적함'에 방해가 된다. 이곳은 '펀둥펀둥 게으르고만' 있을 곳인 까닭이다. 여기서 뒹굴뒹굴 거리는 것이 어찌 행복이니 불행이니 따위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절대적인 상태'! 행복도 불행도 아닌 내 몸에 꼭 맞는 방인 셈이다.


내 방은 침침하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낮잠을 잔다. 한 번도 걷은 일이 없는 내 이부자리는 내 몸뚱이의 일부분처럼 내게는 참 반갑다. 잠은 잘 오는 적도 있다. 그러나 또 전신이 까칫까칫하면서 영 잠이 잘 오지 않는 적도 있다. 그런 때는 아무 제목으로나 제목을 하나 골라서 연구하였다. 나는 내 좀 축축한 이불 속에서 참 여러 가지 발명도 하였고 논문도 많이 썼다. 시도 많이 지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가 잠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내 방에 담겨서 철철 넘치는 그 흐늑흐늑한 공기에 다 비누처럼 풀어져서 온데간데가 없고 한참 자고 깬 나는 속이 무명 헝곂이나 메밀껍질로 뜅뜅 찬 한 덩어리 베개와도 같은 한 벌 신경이었을 뿐이고 뿐이고 하였다.

- <날개> (275쪽)


이 방은 생산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게으름, 곧 안식과 쉼을 위한 공간이다. 잠을 자고 궁리를 하는 공간. 그러나 잠은 내일을 위한 휴식이 아니다. 이런저런 궁리도 마찬가지. '흐늑흐늑한 공기에 다 비누처럼 풀어져서 온데간데' 사라지는, 모든 것을 녹여내는 공간이다. 거기서 나는 '한 벌 신경'으로 눈을 감고 눈을 뜨며 시간을 지낼 뿐이다. 


그는 결핵을 앓았고 실제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소설에서는 콜록거리는 그의 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허덕이며 죽음의 의미를 탐구하였으나 어느 것도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별로 없었나 보다.


그는 무덤 속에서 다시 한 번 죽어버리려고 죽으면 그래도 또 한 번은 더 죽어야하게 되고 하여서 또 죽으면 또 죽어야 되고 또 죽어도 또 죽어야 되고 하여서 그는 힘들여 한 번 몹시 죽어보아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는 여러 번 여러 번 죽어보았으나 결국 마찬가지에서 끝나는 끝나지 않는 것이었다.

- <지도의 암실> (같은 책 166쪽)
인생도 이럭저럭하다가 그만일 것인데 낯모를 여인에 웃음까지 산 저고리의 지저분한 경력도 흐니부지 다 스러질 것을 이렇게 마음 졸일 것이 아니라 앙뿌르에 봉투 씌우고 옷 벗고 몸덩이는 침구에 떠내어 맡기면 얼마나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어 편할까 하고 그는 잔다.

- <지도의 암실> (같은 책 172쪽)

   

죽음, 혹은 잠이더라도 편안함과는, 안식과는 거리가 멀다. 잠시 망각할 뿐이고, 잠시 미루어 둘 뿐이다. 그러니 밖은 낯설고 방은 친숙하다. 누구를 만난다는 것도 싫고,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그가 이야기하는 공포란 해결하기가 도무지 어렵다. 무엇인가를 없앤다고 해결될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불안, '생활', 혹은 '생계'에 대한 좌절감. 그는 건강한 생활인은 아니었다. 


생활, 내가 이미 오래 전부터 생활을 갖지 못한 것을 나는 잘 안다. 단편적으로 나를 찾아오는 '생활 비슷한 것'도 오직 '고통'이란 요괴뿐이다. 아무리 찾아도 이것을 알아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 <공포의 기록> (197쪽)
사람이 나를 싫어할 성싶은데 나도 사실 내가 싫다. 이렇게 저를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 남을 위할 줄 알 수 있으랴. 없다. 그러면 나는 참 불행하구나.

이런 망상을 시작하면 정말이지 한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힘이 들고 힘이드는 것이 싫어도 움직여야 한다. 나는 헌 구두짝을 끌고 마당으로 나가서 담 한 모퉁이를 의지해서 꾸며놓은 닭의 집 가까이 가 본다.

- <공포의 기록> (200쪽)


문득 그에게도 생기가 보이곤 한다. 스스로도 방 안에서 그렇게 빼빼 말라죽을 것을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멀리 나가지는 못한다. 조금 밖으로 나가지만 밖은 여전히 불친절하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술이 친구가 되고 질척이는 삶은 밖에서도 흐리멍덩하게 흐려진다.


밤이면 나는 유령과 같이 흥분하여 거리를 뚫었다. 나는 목표를 갖지 않았다. 공복만이 나를 지휘할 수 있었다. 성격의 파편 - 그런 것을 나는 꿈에도 돌아보려 않는다. 공허에서 공허로 말과 같이 나는 광분하였다. 술이 시작되었다. 술은 내 몸속에서 향수 같이 빛났다. 

바른팔이 왼팔을, 왼팔이 바른팔을 가혹하게 매질했다. 날개가 부러지고 파랗게 멍든 흔적이 남았다.

- <공포의 기록> (209-210쪽)


... 은화를 지폐로 바꾼다. 5원이나 된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는 목적을 잃어버리기 위하여 얼마든지 거리를 쏘다녔다. 오래간만에 보는 거리는 거의 경이에 가까울 만치 내 신경을 흥분시키지 않고는 마지않았다. 나는 금시에 피곤하여버렸다.

- <날개> (282쪽)


흔히 이상의 소설을, 1930년대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을 묘사했다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으면서 가까운 내 내면을 발견하기도 한다. 공복에 음주. 공허와 벗 삼아 밤을 맞는 법. '목적을 잃어버리기' 위한 방황.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아마 이상보다는 갑절은 많지 않을까. 우리 나이로 28살에 세상을 떠난 이상보다는 한참이나 오래 살았으니 말이다. 


그저 한없이 게으른 것 - 사람 노릇 하는 체 대체 어디 얼마나 기껏 게으를 수 있나 좀 해보자 - 게으르자 - 그저 한없이 게으르자 - 시끄러워도 그저 모른 체 하고 게으르기만 하면 다 된다. 살고 게으르고 죽고 - 가로되 사는 것이라면 떡 먹기다. 

- <지주회시> (214쪽)


'살고 게으르고 죽고' 마냥 이렇게 지내고 싶기도 하다. 이것도 욕망이라면 욕망이라고 하자. 대관절 무엇을 낳을지는 모르지만 나 역시 몹시도 바라는 삶이 때때로 이렇다. 내 생에 드리운 그림자가 욕망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렇게 태평하지도 넉넉하게 게으르지도 못하고 있다. 게으름이란, 대놓고 게으름이란, 세상을 모른 체 하고 게으름이란 뻔뻔하고 당당해야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서 나쁜 짓을 해보고 싶다. 이렇게 어두컴컴한 방 안에 표본과 같이 혼자 단좌하여 창백한 얼굴로 나는 후회를 기다리고 있다. 

- <공포의 기록> (212쪽)


결국은 혼자 있는 방 안이다. 나쁜 짓도 혼자서. 세상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 테니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지른다 해도 피해받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상은 동경으로 넘어가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12월 12일'을 생각하면 낯선 곳에서 낯선 삶을 해보고 싶었을 테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방'에서 멀리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는 물론 그 자리에서 혼도하여버렸다. 나는 죽었다. 나는 황천을 헤매었다. 명부에는 달이 밝다. 나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태허에 소리 있어 가로되 너는 몇 살이뇨? 만 25년 11개월이올시다. 요사夭死로구나. 아니올씨다. 노사老死올씨다. 

- <종생기> (354쪽)


그의 글은 모두 20대의 글이다. 그러나 청년은 보이지 않는다. 그 스스로 이야기했듯 그의 영혼은 낡았고 무뎌진 상태였다. 요절이라는 수식은 절반의 진실만을 전할 뿐이다. 채 서른이 되지 못한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뿐. 그러나 그가 당면한 생의 분투, 끈질긴 갈등의 현장은 무시하고 있다. 하긴, 몇 살을 살았든 낡고 무딘 마음을 건져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12월 23일 아침 나는 신보정 누옥 속에서 공복으로 하여 발열하였다. 발열로 하여 기침하면서 두 벌 편지는 받았다.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거든 오늘로라도 돌아와주십시오. 밤에도 자지 않고 저는 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정"

"이 편지 받는 대로 곧 돌아오세요. 서울에서는 따듯한 방과 당신의 사랑하는 연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서."

- <실화> (326쪽)


그의 쓸쓸함이 낯설지 않아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꾹꾹 눌러쓰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러나 문득 피식 깨닫는 사실이란 공복이 삶을 우울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늘 배를 채워야지. 잘 차려진 정찬은 없어도 슬픔을 먹고, 우울을 먹고, 고독을 먹지는 말아야지. 든든한 뱃속이라야 그나마 힘을 낼 수 있는 법이다.


어떤 사람은 그의 대표작 <날개>에서 희망을 읽어낸다. 날개를 돋아 멀리 날아가리라고. 그러나 그런 희망찬 해석은 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푸른 창공을 훨훨 나는 인물은 아니었다. 설사 얼마간 날아오른다 한들 얼마나 날 수 있었을까.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 <날개> (299-300쪽)


누누한 이 내 혼수昏睡덕으로 부디 이 내 시체에서도 생전의 슬픈 기억이 창궁 높이 훨훨 날아가나 버렸으면 - 

- <종생기> (355)


다음 주엔 그의 소설에도 등장하는 정지용의 시를 읽는다. 다음 달에는 그의 친우,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 김유정의 단편집을 읽는다. 부러 책을 그렇게 선정하지는 않았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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