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도는 옳은가 그른가

나를 물어뜯는 질문들 6

by 기픈옹달

많은 사람이 사마천의 <사기>가 공자의 <춘추>를 계승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해석이 맞는지 모르겠다. 일단 공자가 <춘추>라는 책을 썼는지조차 불분명하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춘추>의 정신으로 꼽는 실록實錄의 정신, 포폄褒貶의 정신이 <사기>의 근간이 된다고 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춘추>는 역사를 규범이 실현되고, 증명되는 현장으로 해석했다. 간단히 말하면 선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그러나 사마천의 접근은 다르다. 대관절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궁형의 치욕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단 말인가? 궁형에 이른 것은 사마천 자신의 죄 때문일까? 아니면 한무제의 횡포 때문일까? 공자는 역사에 별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마천은 날아오는 질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날아드는 날카로운 질문들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를 물어뜯는 질문들이 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질문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질문들이 있다. 순조로운 인생은 모르는, 억울한 인생에 뒤따르는 자연스런 질문들이 있다. 사마천은 이런 질문의 연장선에서 <사기>를 저술했으며 그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로 백이와 숙제를 소개하고 있다.


백이와 숙제는 '명'이 쇠락한 시대라 말한다. 이때의 '명'이란 앞서 언급한 것보다는 더 큰 의미를 갖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주무왕이 은주왕 토벌을 내세우며 천명天命을 이야기했듯, '명'은 하늘이 국가에 내린 신성한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찍이 <노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천도는 특별히 친한 자가 없으며, 항상 선인과 함께 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


그러나 정말 그런가. 은나라는 악한 임금이 통치하였기 때문에 멸망했으며 주나라는 선한 임금이 통치하여 천명을 받아 은나라를 정벌할 수 있었는가. 사마천이 궁극적으로 던지는 질문을 들어보자.


余甚惑焉,儻所謂天道,是邪非邪?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도대체 '천도'라고 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공자나 노자의 말에 수긍한다고 치자. 그러나 현실로 눈을 돌리면 의문 투성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공자의 제자 안연이 그랬다. 한편 포악한 짓을 일삼으면서도 천수를 다 누리는 자가 있다. 도척이 그랬다. 비단 과거만 그런가?


이것은 특히 두드러진 명백한 예들이지만, 근세에도 법도에 벗어난 행동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만 골라서 하면서도 일생을 편안히 살뿐 아니라 그 부귀를 대대로 계속 누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땅을 가려서 밟고 때가 되어야 말을 하며 사잇길로 가지 않고 공정한 일이 아니면 발분하지 않으나 재앙을 만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는 심히 당혹함을 금치 못하겠다. 도대체 이른바 천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마천을 괴롭혔던 질문은 우리도 괴롭힌다. 사마천은 선한 자가 복을 받기는커녕 화를 입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뿐인가 악한 자가 잘 살기도 한다. 병이라도 걸리면 모르겠는데, 무병장수한다. 게다가 그 자손들까지 떵떵거리며 산다.


하늘(天道)은 무력하다. 불의는 소리 없이 이유 없이 찾아온다. 사마천 본인에게는 궁형의 치욕이 바로 그런 것이었으리라. 이 불의, 불우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사마천은 '읽기'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모색한다. 역사를 읽기. 이것을 다른 말로 옮기면 '기억하기'라고도 할 수 있다.


온 세상이 혼탁한 연후에 청사淸士가 나타나는 것이다. 어찌 (불인한 자가) 그토록 잘살고 (인자가) 그토록 불우해야 한단 말인가?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가의는 '탐욕한 사람은 재물을 위하여 죽고, 열사는 명성을 위해 죽으며, 권세욕이 강한 사람은 권력을 좇다 죽는다. 평범한 서민은 다만 (자신의) 생명만을 돌아본다' '같이 밝은 것은 서로 비추며, 성질이 같은 것은 서로 찾는다'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 성인이 일어나면 만물의 정이 모두 보이게 된다'고 말한다.

백이, 숙제는 비록 현자였으나 공자를 통하여 이름이 더욱 빛났으며, 안회도 비록 배움을 좋아하기는 하였으나 기린의 꼬리(공자)에 붙어 더욱 그 행적이 유명해진 것이다. 산간 바위굴에서 (덕행을 닦은) 사람들도 때에 따라 알려지기도 하고 망각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의 이름이 인멸되어 칭송되지 않는다면 심히 슬픈 일이다. 동리에 파묻혀 행실을 닦아 이름을 세우려고 하지만, 그것을 세상에 전할 성현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이름을 후세에 남길 것인가?


성인이란 시대의 진실을 전해주는 사람이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개인의 삶을 집어삼키는 순간에도, 성인들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는 인물이 있다. 그것은 같이 밝은 것은 서로 비추며, 성질이 같은 것은 서로 찾'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들이 읽어낸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이렇게 과거를 읽는다는 것은 자신을 발현하는 과정이다. 사마천은 과거 인물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도록 도와주는 성현의 자리를 자처한다. 그가 역사를 읽고 쓰는 과정은 다르게 말하면 자신을 후세에 드러내는 활동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마천은 과거의 인물과 공명하며 자신을 드러내었다.


태사공 자서 말미에 보았듯 사마천은 이와 공명하며 또 다른 누구를 만나기를 고대했다. 고대의 훌륭한 인물과 공명하는 자신을 '성현(青雲之士)'이라 불렀다면, 마땅히 이런 자기와 공명할 누군가도 '성인군자'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때 조차 '성인군자'이기에 사마천과 공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마천을 읽으며 공명할 때 사마천이 말한 '성인군자'의 무엇을 체득하게 되는 게 아닐까.


자, 우리는 사마천을 읽는다. <사기>를 읽는다. 그 숱한 인생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울분 위에서, 사마천을 물어뜯었던 질문에 공명하며 원망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사람이라면 사마천의 <사기>와 공명하는 부분을 만날 수 있으리라. 이를 울분의 읽기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사마천의 <사기>가 고전이 된 것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질문을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불행을 어떻게 감내할 것인가? 하늘이란 옳은가 그른가? 어쩌면 이런 질문은 대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닐지 모른다. 이 질문은 끝내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울분과 원망을 삭이며 사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더라도 어느 순간 새로운 만남을 통해 해소되기도 한다. 사마천에게는 울분의 글쓰기가 그 길이었다. 공명의 현장. 우리는 또 누구를 만나 이 울분과 원망을 풀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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