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준다는 것 5
예양은 진晉나라 사람이다. 그는 진나라가 붕괴되고 세 대부가 각기 이 나라를 갈라 갖는 시대를 살았다. 그런데 그는 한때 진나라의 실력자였던 지백을 섬겼다. 지백은 진나라의 최고 실력자였으나 그 아래에 있던 조씨, 한씨, 위씨가 연합하여 지백을 죽였다. 예양은 이 셋 가운데 앞장서 지백을 죽인 조양자에게 커다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조양자는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을 하여 술잔으로 쓸 정도였다나. 예양은 지백의 원수를 갚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꾸민다고 했다. 지금 지백이 나를 알아주었으니 내 기필코 원수를 갚은 뒤에 죽겠다. 이렇게 하여 지백에게 은혜를 갚는다면 내 영혼이 부끄럽지 않으리라."
사마천이 말하는 '사士'는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백면서생을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사람, 그런 결연하고도 날카로운 사람을 가리킨다. 예양은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고자 숨죽여 칼날을 간다.
그는 성과 이름을 바꾸어 숨어 살다 조양자의 궁궐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죄인으로 조양자의 화장실을 수리하는 일을 맡은 것. 화장실을 수리하다 틈을 엿보아 조양자를 찔러죽이고자 했던 것이자. 그런데 조양자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그의 기척을 알아채고는 그를 찾아낸다.
조양자는 예양을 의인義人이자 현인賢人이라고 치켜세운다. 그러면서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만류하고 그를 살려 보내준다. 아마도 그는 주변 사람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이렇게 말하고 놓아주었던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조양자의 입을 통해, 사마천의 글을 통해 예양에게 ‘의義’라는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마천은 자객의 이야기를 통해 '의'를 새롭게 정의한다.
예양은 조양자의 집에서 쫓겨난 뒤에도 복수의 길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온몸에 옻칠을 하여 문둥이로 꾸미고 숯가루를 먹어 목소리도 바꾸었단다. 사람들이 자신을 못 알아보도록. 그렇게 모습을 바꾸곤 구걸하면서 다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 친구가 그를 만나보고는 어찌 그토록 수고로운 방법으로 복수하느냐고 말한다. 차라리 조양자에게 잘 보여 그의 신하가 되었다가 곁에서 그를 죽이면 낫지 않을까? 그때 예양의 말.
"예물을 바치고 남의 신하가 되어 섬기면서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은 두 마음을 품고 자기 주인을 섬기는 것일세.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매우 어렵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까닭은 천하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일세"
여기서는 예양이 이야기하는 부끄러움(愧)에 주목하자. 예양이 조양자를 죽이려는 것은, 그것도 매우 힘든 방법으로 그 일을 도모하는 것은 바로 부끄럽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부끄러운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중요한 잣대이다.
비록 표현은 좀 다르지만 맹자 역시 부끄러움(恥)을 말한다. 맹자는 불의不義를 저지르는 것이 부끄러움이다. 따라서 맹자는 부끄러움을 통해 기존의 규범을 견고히 다진다. 그러나 예양의 입을 빌어 사마천이 이야기하는 부끄러움이란 다르다. 그의 부끄러움은 기존 규범에 갇혀있지 않다. 맹자의 의란 필부로서 대부 혹은 군주를 살해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반면 사마천의 <자객열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을 감행한다.
예양이 다시 붙잡히자 조양자가 지적한 문제도 바로 이점이다. 예양은 지백을 섬기기에 앞서 범씨와 중항씨를 섬긴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지백에 의해 죽임 당했다. 지백을 죽였다는 이유로 조양자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면 왜 앞서 범씨와 중항씨가 죽었을 때 지백에게 그 원수를 갚지는 않았을까? 지백의 원수를 갚는데 집착하는 것이야 말로 지조가 없는 행동이 아닐까?
이에 예양은 앞서 범씨와 중항씨의 대우와 지백의 대우가 달랐다고 말한다.
"저는 범씨와 중항씨를 섬긴 일이 있습니다. 범씨와 중항씨는 모두 저를 보통 사람으로 대접하였으므로 저도 보통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보답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백은 저를 한 나라의 걸출한 선비(國士)로 대우하였으므로 저도 한 나라의 걸출한 선비로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양의 복수는 단순히 신하로서 군주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거꾸로 말하면 자신의 삶을 다른 식으로 의미화하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군주를 제대로 섬기지 못했다는 것 따위가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알아주었던 것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을 의미한다. 그가 나를 국사國士로 대했다는 나 역시 국사國士로 대응해야 할 것.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야 말로 부끄러운 일 아니겠는가?
예양이 결코 자신을 죽이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 조양자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예양은 한 발짝 더 나아가 다른 요구를 한다. 죽는 일이 마땅하기는 하나 당신의 옷을 얻어 원수를 갚는 뜻을 이루도록 해달라는. 이에 조양자는 예양의 요구에 따라 겉옷을 건네주었고 예양은 그 겉옷을 세 번 찢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어떻게 보면 얼토당토않은 요구이지만 그의 말을 들어준 조양자도 비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는 예양의 저 말을 ‘크게 의롭다(大義之)’고 여겼다. 사마천의 말을 통해 의義라고 표현되지만 언뜻 보면 이해하기 힘든 어떤 정신이 이들에게 공유되고 있었던 것이다. 예양이 죽던 날 조나라의 지사志士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예양의 뜻(義/志)에 공명하는 것은 조양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사마천에게 이 자객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누군가를 찔러 죽인 잔혹한 사람의 이야기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은 도리어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확장하고 완성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달리 평가할 수 있는 길을 찾았으며 동시에 그 길로 오롯이 자신의 삶을 내던져 살아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칼은 쇠붙이에서 탄생하기는 하나 모든 쇠붙이가 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어떤 뜨거움, 스스로를 녹여내는 강렬한 열기가 있어야 한다. 더불어 날카롭게 다듬어져야 하기도 하다. 날카로움이란 칼이 갖는 최고의 미덕이다. 한 존재가 갖는 특정한 역량을 미덕이라 부를 수 있다면 날카로움 역시 중요한 미덕의 하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양은 단순히 칼을 든 자객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칼처럼 날카롭게 벼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객이란 칼을 든 사람이 아니라 칼날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동대문도서관 강의 : 사마천의 인생극장(8강)의 강의안 초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