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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Mar 11. 2020

느리게 가르쳐도 된다고 믿습니다.

코로나 방학, 요리로 통합학습.

겨울방학 동안 고사리손 막내는 새 학기 예습보다 제과제빵에 빠졌다. 아이가 어릴 때는 생각도 못할 체험이었다.  어질러지면 엄마일이 되기에 징징거려도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었다. 아이의 키가 엄마의 근처에 닿을 만큼 컸는지 제 앞가림을 잘하기 시작했다. 재료 세팅에서 과정, 그리고 정리까지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리까지 다 하고 달달구리 간식도 내미는데 어찌 말릴 수 있을까.

100프로 초딩작품. 휘핑기도 마련해서는 스스로 다했네

젤라틴가루를 사주었더니 아이는 간이 커졌다. 온라인 마켓에 휘핑기를 담아두고 결제를 요청했다. 재료비가 쏠쏠찮게 들면 막아서겠지만 아이는 쟁여놓은 세뱃돈 봉투를 두둑이 조공했다. 재료와 도구가 완비되니 아이는 어려운 것도 도전하고 싶어 했다. 소소한 것에 성공이 자신감으로 이어져 용기백배가 되었다. 젤리 만들기 성공에서 머랭 쿠키로 사뿐하게 넘어가더니 쿠키를 굽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제 먹을 음식을 뚝딱 만들어 혼밥을 하는 일도 많아졌다.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더 풀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과 아이의 길은 달랐지만 성장이라는 면에서는 더 효과적인 것 같아 내심 대견했다.  

고학년 사회 과학은 새로운 개념도 많고 한자어도 늘어 예습 없이는 어려운 내용이 많다. 아이에게 약한 분야인데 준비가 급했다. 아이는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류를 많이 읽어왔다. 그래서인지 문맥의 흐름 파악에 능하고 등장인물 간 갈등 양상, 그리고 심리적 변화도 잘 찾았다. 뒷이야기 예측이나 바꾸기도 잘하고 공감을 통한 감정정화도 스스로 했다.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는 아이에게 사회과학 영역의 책은 난데없는 요구였고 펼치기도 싫은 분야였다. 어휘력이 딸리면 이해력도 떨어지는 법. 독서로 따라잡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리라는 체험학습에 몰두하는 아이를 지켜보고있어야했다.


3개월 동안 유튜버들의 영상을 매일 몇 시간씩 시청한 결과인지 아이는 고급지고 전문 어휘가 잔뜩 묻은 말을 했다. 요리 방법은 안 보고도 줄줄 꿰게 되었다. 재미로 하는 아이들 놀이에 큰 의미부여 일지 모르지만 세상을 보는 눈도 자라고 있었다. 크리에이터들의 특장점은 물론이며 그들이 잘하는 분야도 파악하고 있었다. 크리에이터의 구독자 수에 민감했고 그들의 구독자 유지 비법도 스스로 분석하고 있어 놀라웠다. 나는 책으로 글로 배우는 마케팅 전략이나 콘텐츠 구상 등을 아이는 스스로 알아채다니. 젤리 만드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아이의 탐구는 확장되고 있었다.


아이는 요리분야 어휘력 습득뿐 아니라 학습으로 도움되는 확장도 경험하게 되었다. 낯선 어휘를 찾아보면서 한자어나 영어를 접하게 되고, 재료의 양을 맞추면서 비율을 체득했다. 용량을 재는 단위도 익숙해지게 되었다. 불을 사용하니 온도에 따른 물질의 상태변화에도 관심이 커져(오븐 예열 온도, 예열시간에 따른 결과물의 차이. 굽는 온도에 따른 시간차와 굽는 정도의 변화 등) 수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실전학습을 스스로 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니 은근 야망이 생기려 했다. 아이가 눈을 뜬 분야에서 뛰어나게 만들고 싶은 의욕. 현재 호기심과 즐거움을 학습과 연관시키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된다. 아이를 책상 앞에 불러 따박따박 책을 읽고 질문하고 대답하는 틀에 집어넣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내 마음을 꾸꾹 누르고 아이에게 다양한 재료를 던져주고 자리를 피한 적이 많았다. 엄마가 옆에 있으니 아이는 눈치를 보며 마음껏 탐구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였다.


아이의 스스로 찾은 관심사에 김 빠지게 만들면 안 된다. 큰 틀을 제시하고 그것을 넘지 않는 선에서 아이가 정한 약속에 책임을 지도록 하면 되었다. 실험과정에 나는 빠지는 게 득이었다. 처음 몇 번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것 외에 내가 한 것은 없었다. 아주 친절한 유투버 선생님들은 나보다 더 전문적이어서 일어날 위험까지도 친절히 지도했다. 결국 실수와 실패를 겪더라도 아이 스스로 문제 해결할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허락한 것이며 엄마 주도를 내려놓은 것뿐이다. 성급하게 도와주려는 엄마의 과잉 의욕을 버릴 때 아이는 마음껏 탐구해볼 수 있다고 믿는다.


코로나로 시간이 넘쳐난다. 넘치는 시간을 허비하면 안 된다고 열정 있는 학부모들이 말한다. 그런데 전염병의 창궐 앞에 세상이 멈춰 뭘 더 할 수도 없다. 선행을 시켜놓아야 안심할 실력이 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좋은 부모는 아이가 남보다 뛰어나도록 먼저 끌어주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 그런 믿음이 더 강해지는 것 같다.  부모가 아이를 만든다는 믿음이 반은 옳겠지만 나에게는 옳지 않다. 부모의 헛된 믿음으로 아이를 과도한 학습노동현장에 몰아넣고 싶지 않다.


학습의 기본만 잘 따른다면 다른 분야 체험은 적극찬성이다. 요리든 악기든 운동이든 한 분야에 심취하고 스스로 가설을 세워 탐구해보고 결과까지 맛보는 아이라면 동기부여되는 날 탐구력을 학습에 과감히 발휘할 것이라고 믿는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늦어질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게 정답이다. 나는 이렇게 살기로 매일 결심하고 있다.


작은 성공이 아이 마음까지 키워준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요리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를 실천하면서 얻는 어휘력, 그리고  연관된 다른 영역으로의 확장. 학습이 책으로만 얻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한다. 아이는 겨울방학 동안 학습뿐 아니라 자신감도 강해졌다. 자신이 만든 쿠키를  내밀며 웃는 미소 속에 행복감. '나는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튼튼한 자존감. 아이는 위기와 역경 앞에 스스로를 우뚝 세울  마음의 초석을 세우는 중이다. 회복 탄력성이 따로 있겠는가. 일상 속에 소소한 자발적 체험, 실패 앞에 재도전으로도 탄력적인 사람이 되기 충분하다.



늦은 새 학기가 시작되면 아이의 관심사는 또 변하겠지, 그러면 나는 필요한 재료를 사다 나르면 된다. 부모 노릇 하기 참 쉽다. 하루에도 몇 번을 작동하는 오븐 덕에 이번 달도 전기세 폭탄은 각오할 뿐. 그래, 부모 노릇 참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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