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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May 29. 2017

영국과 프랑스: 그 애증의 역사를 그림에서 찾아보다.

예술사-호가스의 '칼레 대문'

윌리엄 호가스의 '칼레 대문'.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읽을 수 있다.


영국이 EU탈퇴를 결정하면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와 이민이지만 한편으론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형성된 쉽게 드러내지 않는 내면의 라이벌의식과 경쟁심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인 프랑스와의 역사적 관계를 보면 어떻게 영국이 좁은 바다넘어 있는 유럽대륙과의 관계를 맺었는지 가늠해 볼 수도 있다. 자매 도시인 영국의 도버(Dover)와 프랑스의 칼레(Calais)는 서로 마주보며 지척에 마주하면서 좋든 싫든 두 나라의 역사적 고비때마다 이름을 오르내렸다.

미술에서도 이런 라이벌 의식과 동시에 열등의식도 작용했었는데 보통 프랑스 미술에 비해 스스로 열등의식을 가진 영국에서 종종 일어났다. 영국의 18세기 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 – 1764)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는 화가였을뿐만 아니라 목판화가(print maker)이었으며 또 요즘으로 치면 '신문 만평가'이자 '사회비평가'였다. 특히 그가 시도한 그림 연작 시리즈는 전에 없었던 시도이고 아주 대중적이었으며 사회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인기도 많이 끌었다.

그러나 그는 대륙, 특히 프랑스를 싫어하였다. 그의 그림 ‘칼레 대문(The Gate of Calais)’은 그의 프랑스에 대한 민족적, 모욕적, 인종적, 종교적 편견이 잘 드러난 그림이다. 그렇지만 사회 풍자가답게 익살스러움도 이 그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아주 큰 사이즈의 '영국 쇠고기(British beef)'를 그림의 정중앙에 위치시켜 놓았다. 몸이 비쩍 마른 한 프랑스 인부가 이 무거워 보이는 쇠고기를 당시 칼레에 있던 영국 주막(펍. English inn. 이름이 “Lion d'Argent”)으로 운송중이다. 칼레의 영국 펍은 이 북서쪽 프랑스의 도시가 오랫동안 영국지배하에 있었다는 걸 상기시킨다. 그래서 호가스 시대인 18세기엔 영국풍의 건물이나 유적이 이 도시 곳곳에 남아있었다. 이 그림 한 복판의 쇠고기로 얼마나 영국이 번영하는지 호가스는 의도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이 쇠고기와 똑같은 선상에 피골이 상접한 프랑스 군인이 도개교(drawbridge. 부산 영도다리와 같은), 칼레 대문앞 바로 양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그림이 풍자적인 걸 쉽게 읽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큰 쇠고기 덩어리와 바로 대비되도록(비슷한) 중앙의 뚱뚱한 가톨릭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의 모습이다. 이 배가 퉁실하게 나온 수도사는 그림속 프랑스 사람들 중 오직 뚱뚱한 사람이다. 나머지는 피골이 상접한 프랑스인들이고 그 중 한명은 스코틀랜드인이다. 이 수도사는 이럼에도 영국 쇠고기가 얼마나 군침이 도는지 침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살짝 찔러보고 있다. 한마디로 '탐욕'을 보여준다. 얼마나 종교, 특히 당시 영국 성공회에 비해 프랑스의 가톨릭 교회가 타락했으며, 일반 민중은 빈곤에 빠져 허득이는데 반해 종교인들은 잘먹고 잘산다는 뼈아픈 풍자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두명의 바짝 마른 프랑스인이 돼지죽같은 수프를 바스켓에 담아 힘겹게 들고 가고 있다. 프랑스엔 수프밖에 먹을게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퉁실한 영국 쇠고기와 이를 의도적으로 비교시킨다.

오른쪽 앞에는 굶어가는 스코틀랜드 ‘자코바이트(Jacobite. 제임스 왕을 옹위하기 위한 스코틀랜드 반란인들을 지칭. 그러나 실패함. 1745년)’가 주저 앉아 기도하는냥 두 손을 모으고 있고, 양파 한개와 마른 빵밖에 먹을게 없는지 그의 옆에 놓여있다. 그의 스코티쉬(Scottish) 타르탄 첵크무늬 옷을 입고(영국 명품 버버리의 패턴인) 있어서 쉽게 눈치챌수 있다. 엎어진 컵이 그의 옆에 놓여있다. 희망이 없음을 보여준다. 이 스코틀랜드인은 동맹국인 프랑스로 건너 왔지만 이런 곤궁을 겪고 있다. 잉글랜드인인 호가스가 프랑스와 스코틀랜드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을 볼수있다. 더구나 음산하게도 검은 까마귀가 대문의 돌 십자가위에 턱 앉아있다. 운수사납다. 상징적으로 이 곤궁한 처지를 더욱 확대해 보여준다. 칼레 대문이 그림의 틀처럼 보이고 그 안을 보면 흰 비둘기가 여관(Inn)의 사인, 십자가에 보이며 이는 가톨릭 교회를 풍자한다. 비둘기(Dove)는 성령의 상징이며 어찌보면 미사가 거행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림 왼쪽앞의 여인들(the fish-wives)은 괴상하게 사람 얼굴과 닮은 홍어(skate)를 향해 두손모아 합장하고 있다. 이 굶주림에 빠진 프랑스 여인들이 ‘우상숭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성공회가 가진 편견, 즉 가톨릭 교회가 미신적이라고 하는 편견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한편으론, 의도적으로 이 사람 얼굴을 닮은 홍어로 표현해 놓아 너무 굶주린 나머지 빈곤한 프랑스인들이 ‘식인’까지 한다는 암시도 될수있다. 어찌 무섭다... 이 여인들 뒤편으로 화가 자신이 나온다. 그는 칼레의 도개교를 스케치하는데 프랑스 경찰의 긴 총이 그의 머리위로 지난다. 권위로 민중을 억압하는 상징이다.

이 그림의 다른 이름은 재미있게도 그림의 애국적인 주제를 말하고 있다. “오, 옛 잉글랜드의 로스트 비프여(O, the Roast Beef of Old England)” 이다. 이 속제목은 당시 인기있던 헨리 필딩(Henry Fielding)의 ‘그럽 스트리트 오페라(The Grub-Street Opera. 1731)’ 란 아주 애국적인 노래가사로부터 왔다. 이 가사에선 어떻게 잉글랜드 음식이 잉글랜드 사람들의 머리를 명석하게하고 피를 맑게 하는지, 여기에 반해 곧 연기처럼 사라질 타락하고 가난한 프랑스에 대한 반감과 편견을 노래했다. 지금 입장에서 보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까지 오른 프랑스 음식을 깍아내리는 18세기 잉글랜드 사람들의 대단한 과장법과 더불어 열등감을 엿볼 수 있는 것같다. 이 그림은 1761년 영국 ‘미술가 전시 협회(Society of Artists' Exhibition)’가 주관한 전시에 걸렸었다. 이때는 영국이 프랑스와 5년간의 전쟁후였고 얼마나 이 그림이 잉글랜드인들의 애국심을 자극시켰는지 상상해 볼수 있다.

그러면 왜 화가인 호가스는 이런 편견이 가득담긴 그림을 그렸을까? 그는 항상 붐비는 런던 시내 피카딜리 서커스에 가까운 성공회 성당에서 세례받았으며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가까운 ‘레스터 광장(Leicester Square)’의 건물에서 견습생으로 일하였다. 대륙의 중심에선 비켜있었지만 떠오르는 제국의 중심, 런던에서 어떻게 세상이 돌아가는지는 알았던것 같다. 당시는 물론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많을 때였고 또 개인적으로 호가스는 대륙에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 몇명과 프랑스를 여행했는데 그다지 좋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프랑스 대혁명 몇십년 전이라고 상상해 보라). 더구나 칼레에서 영국첩자로 오인받아 프랑스 경찰에 붙잡혀 조사까지 받는 수모를 당했고 귀국하자마자 이 그림을 그렸다. 그러니 그의 반감이 이 그림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프랑스에 대한 반감만 가진 속좁은 애국화가는 아니었다. 당시 영국의 문화는 태양왕 루이14세가 꽃피운 화려하고 세련된 또 전 유럽의 문화를 이끈 문화중심지 프랑스에 대한 반감인 동시에 그 뒷면으론 얼마나 문화대국 프랑스가 소수의 귀족과 종교인을 뺀 나머지 민중이 헐벗고 굶주렸는지를 경험하고 고발했다. 그에 대한 비판이 이 그림으로 이어졌고 그의 예견은 후에(1789) 프랑스 대혁명으로 나타났다. 과연 호가스 답다. 동시에 유럽의 정치와 군사의 강자로 떠오른 영국은 경제적으로도 빈부격차가 적었다. 그러나 문화적으론 아직도 대륙의 수준에 못올라 이태리 화가나 프랑스 화가의 그림이라면, 단지 이태리나 프랑스 화가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영국화가에 비해 웃돈을 얹어주며 심지어 몇배의 비싼값으로 판매되곤 하는 현상을 심히 못마땅해하고 울분을 토하였다. 호가스는 이런 현실에 반발하며 왜 영국화가라는 이유로 자신의 그림값이 대륙화가의 그림값보다 싸게 매겨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그 미술값은 영국인 스스로 매기는 것이고 이는 정치 경제적으로 발전한 영국이지만 문화적 열등의식을 그대로 지닌 현실에 대한 예술가적 반발이었다. 그래서 단지 대륙화가의 그림뿐만 아니라 종속적인 영국 사회 문화 풍토에도 비판을 가하였고 심지어 ‘그림값’ 문제로 법정에 까지 갔으니 그는 행동하는 예술가였다. 예술가의 권리를 제대로 주장한 어쩌면 ‘데미안 허스트’의 먼 선배격이라고 할까? 하여튼 그는 제대로 된 그림값을 받고 또 제대로된 화가의 권리를 인정받고 싶어했다.

‘브렉시트(Brexit)’로 나라안이 시끄러운 요즘에 윌리엄 호가스의 ‘칼레 대문’ 그림이 새삼 떠오르는 것은 이웃에 대한 반감과 편견은 어디에나 있고 또 하루 이틀 사이에 형성된 것이 아닌 것같다. 또한 반감과 편견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열등감에 기인하며 한편으론(긍정적으로 본다면) ‘자기찾기’의 한 과정이기도 한 것같다. 호가스는 ‘남 탓’ 만이 아닌 ‘우리 탓’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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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Artist William Hogarth, 1748, Oil-on-canvas, 80 cm × 96 cm (31 in × 37 5⁄8 in), Tate Britain,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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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 프란치스코회 수도사가 영국 쇠고기를 찔러보고 있다. 풍자의 요소가 다분하다.
목판화로 만들어져 흑백으로 찍기도 하였다.
윌리엄 호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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