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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노랑 Jan 09. 2024

오순도순 초급반 사람들

너그럽지만 끈질긴 마음가짐으로

초급반 사람들은 수줍음이 많다. 수영복을 입은 모습이 어색하기도 하고 물속에서 내 몸뚱이가 무의미한 몸부림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 민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쑥스러운 와중에도 우린 주 3회 눈을 마주치고 같은 고난을 겪으며 내적 친목을 쌓는다. 초급반은 대체로 실력이 겸손해 상위 순서에 있더라도 내가 오늘 좀 못 한다 싶으면 겸허히 뒷사람에게 순서를 내어준다. '헥헥, 먼저 가시겠어요?' 물론 이 페이스로 가다간 진짜 죽겠다 싶어서 살려고 양보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 초급반에는 초등학생 고학년정도의 남자회원님이 있었다. 중고등학생정도로 되어 보이는 친누나와 함께 강습을 다녔는데 여느 남매가 그러하듯 누나는 남동생에게 관심이 없었다. 마치 누나의 역할을 집-수영장 에스코트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아직 집중력이 부족하고 장난기 많은 남동생회원님은 수영을 하다가 중간에 멈춰 서거나 다른 회원님의 수영 중 불쑥 끼어들어 흐름을 막곤 했다.


그럴 때마다 허허 웃으며 아이를 타일러 다시 수영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 건 어느 할아버지 회원님이었다. 할아버지 회원님은 꽤 오래 초급반에 있었으나 실력이 올라오지 않아 대개 뒷 순서에 계셨다. 내가 처음 초급반에 갔을 때 두 회원님이 내 앞에 있었는데 그날도 아이는 중간에 멈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연습을 제대로 못 한다는 생각에 얼굴이 굳은 채 보고 있었는데 그때 할아버지 회원님께서 '이 놈 때문에 수영을 못하겠죠?' 하면서 웃으시며 나를 먼저 보내주셨다. 자신의 실력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오늘 강습이 힘들어서도 아니고 그저 함께 수업 듣는 그 아이를 돌보는 마음이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그저 너그러운 마음.


그 아이와 아마 15살 이상 차이나는 어른으로써 순간 부끄러웠다. 좋은 말로 다시 수영해 볼까? 라든가 내가 먼저 가도 될까? 하고 말을 해도 될 일을 유치하게 뚱하게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날을 계기로 의식적으로라도 타인에게 너그러워지려 노력한다. 지하철에서 느리게 걷는 어른들, 식당에서 돌고래 소리를 내는 아기들, 길에서 동선이 겹쳐 부딪힐 뻔한 내 또래 사람들. 우리 모두 사정이 있고 나도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끼친 순간이 분명 있다. 그러니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며 수영하듯 둥둥 흘려보내면서 살고 싶다.




초급반은 늘 새롭다. 갓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들뜬 설렘이 얼굴에 가득하다. 그리고 초급반은 늘 북적거린다. 어떤 영역이든 피라미드 형태로 레벨이 높아질수록 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적기 때문에 초급반은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근데 또 초급반은 다른 의미로도 새롭고 북적거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초급반 정원은 기가 막히게 유지가 된다. 우리 센터는 정해진 Max 정원이 없어서 등록만 하면 초급반으로 다닐 수가 있는데 그 정원이 절대 일정 숫자를 넘어서는 법이 없다. 왜냐면 늘 사람이 바뀌기 때문이다. 어떤 회원님이 새로 등록하더라도 기존 회원님이 한두 달 다니다가 그만두며 '새롭고 북적이는' 상태가 유지된다.


비슷한 시기에 수영을 시작했던 어느 검정 수모 회원님이 생각난다. 킥판 잡고 발차기부터 시작해서 사이드킥까지 배우며 나는 곧잘 따라 해 쭉쭉 순서를 치고 올라간 반면 검정 수모 회원님은 몇 헤엄 못 가 늘 꼬르륵 가라앉아 계속 뒷 순서에 머물렀다. 거의 빠지는 날 없이 성실하게 나오셨지만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때 우리 초급반 에이스는 단연 파란색 보노보노 수모를 쓴 회원님이었다. 선두에 서서 자신감 있게 자유형으로 치고 나가는 모습은 초급반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1번 자리에 설 수 있을까.


보노보노 - 나 - 검정 수모, 이 깨지지 않는 실력의 균형은 약 한 달 정도 유지되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보노보노 회원님은 중급반으로 올라가라는 특급 명령을 내리셨다. 역시. 초급반의 자랑! 그렇게 나도 초급반 선두권으로 레벨 업하게 되었는데 검정 수모 회원님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였다. 중급반으로 올라간 보노보노님은 당연히 맨 뒤로 가게 되었다. 그래도 같은 반 출신이다 보니 맘 속으로 그곳에서도 쭉쭉 치고 올라가길 바랐는데 중급반의 벽은 생각보다 높은 모양이었다. 그러다 하루 이틀 안 보이시더니 지금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검정수모 회원님은 어떨까. 그분은 내가 중급반으로 갈 때가 되어서야 초급반 중위권으로 올라왔다. 나도 초급반 상위권에 있다가 중급반에 올라오니 정신이 없었다. 초급-중급은 확실히 차이가 났다. 체력부터가 달라서 시작하자마자 자유형 4바퀴를 돌고 또 평영을 했다가 접영을 했다가 쉴틈이 없다. 심지어 배영도 둥둥 떠있는 나뭇잎 배영이 아니라 팔을 이리저리 롤링을 하는 슈퍼 파워 배영을 한다. 뱁새가 황새 쫓아가느라 허벅지가 터져라 발차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검정수모 회원님도 자취를 감췄다.


두 사람 모두 보이지 않는 벽에 답답함을 느낀 것일까.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중급반 난이도와 운동 신경의 한계가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성장은 절대 곡선형이 아니다. 지루하고 긴 정체기 후 단번에 점프하는 계단식 성장이다. 뭐라도 훅훅 느는 맛이 있어야 재미있을 텐데 투입되는 시간과 노력 대비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 보니 점프까지 버티지 못하고 많이들 돌아선다.


하지만 아주 반갑게도 2~3주 전부터 검정수모 회원님이 다시 초급반에 나타났다. 내가 아는 한 끈질긴 사람은 결국 승리한다. 이번엔 검정수모 회원님이 실력과의 대결에서 꼭 점프를 맛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디선가 보노보노 회원님 또한 중급반 에이스가 되어 화려한 레이스를 펼치고 있으리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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