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발차기가 제일 어려웠어요
드디어 첫 수강 날, 새로 장만한 수영 가방에 준비물을 바리바리 챙겨 센터로 향했다. 지난번 1회 11만 원이라는 극악무도한 수강료에 적잖이 마음을 다친 터라 상처를 치료해 줄 정식 강습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대규모 스포츠 센터 시설에 입장하기에 앞서 미리 인터넷에서 수영장 에티켓과 행동 요령을 빠삭하게 익히고 갔다.
수영장에 입장하기 전 꼼꼼한 샤워는 무조건 필수다. ‘전 집에서 샤워하고 왔는데요?’라는 핑계는 절대 통하지 않는다. 집에서 수영장까지 밀봉 상태로 오지 않은 이상 당연히 샤워는 해야 한다. 샤워 후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다음에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다시 사물함으로 갈 필요 없이 중간에 비치되어 있는 선반에 수영가방을 두고 수영장으로 곧장 가면 된다. 자전거는 훔쳐가도 다른 물건엔 손 안대는 우리나라라서 가능한 방식이다.
사전 준비를 무사히 끝낸 후 드디어 수영장에 입성했다. 약간 쭈뼛대며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을 붙잡고 오늘 처음 왔다고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다행히 내 촉은 정확했고 그분이 바로 초급반 선생님이셨다. 오예, 시작부터 착착 맞아떨어지는 것이 앞으로 탄탄대로 수영 라이프가 펼쳐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초급반은 제일 가장자리 레인이었다. 그날 첫 수강자는 우리 일행 2명뿐이었고 가장 처음 배운 것은 바로 발차기다. 다른 회원님들이 킥판 잡고 발차기를 하며 몇 바퀴도는 동안 우린 벽 잡고 제자리 발차기만 했다. 발차기만 하기엔 물에 뜰 줄도 알고 제법 폼도 잡을 줄 알는 나로선 답답한 노릇이었다. 발차기 이거 그냥 파닥파닥 차면 되는 거 아닌가? 여기에 소중한 50분을 쓰는 게 맞나? 일단 하라고 했으니 하고는 있지만 그냥 빨리 숨 쉬고 팔 돌리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만약 당시의 나와 만나게 된다면 일단 꿀밤 100대로 시작할 것이다. 초급자의 발차기는 다리 힘을 기르는 과정인데 이게 곧 피가 되고 살이 되어 훗날 추진력으로 부화한다. 즉 발차기는 수영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간 수능 만점자들이 언급한 국영수 위주의 '탄탄한 기본기'를 떠올려보라. 기본기를 잘 다져야 수능 만점까지 나아갈 수 있듯이 탄탄한 발차기를 통해 허벅지 힘을 발목 스냅까지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첫 수강 날, 선생님은 다리를 쭉 뻗고 힘차게 발차기를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 문장에 어려운 부분은 단 하나도 없지만 실전은 달랐다. 다리를 쭉 뻗고 발등으로 물을 숭덩숭덩 눌러줘야 하는데 물은 꽤나 묵직한 친구라 30초만 해도 얼굴이 시뻘개지고 숨이 모자랐다. 결국 물 밖으로 올라와 한참 헐떡거렸다. 어쩌면 이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빨리 레인 수업을 받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처럼 발차기는 생각처럼 만만한 녀석이 아니다. 자유형을 할 수 있는 지금도 발차기 이 놈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매 수업 몸풀기로 선생님께서 자유형 4바퀴를 시키는데 아직도 들을 때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자유형 4바퀴 동안 발차기가 내게 미칠 영향을 알기 때문이다. 한 바퀴에 숨이 차고 두 바퀴엔 다리 힘이 풀리며 세 바퀴에 몸에 힘이 빠져 네 바퀴는 결국 물을 먹다 먹다 두 발로 걷고야 만다. 아직 발차기 내공이 부족한 탓이다. 배영, 평영, 접영을 배웠지만 자유형이 제일 힘들다. 물론 장거리 자유형을 위한 6비트, 4비트, 2비트 발차기가 있다는데 아직 자유형을 하면서도 내 팔다리가 뭘하고 있는지 모를 때도 많아 비트 발차기는 그림의 떡이다.
또 발차기가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다이어트이다. 수영으로 살 빼는 건 어렵다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바로 팔로만 수영하기 때문이다. 자유형을 하다가 진짜 죽겠다 싶은 타이밍에 나도 모르게 팔만 젓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살기 위한 생존 본능이다. 발차기에 에너지 소모가 많음을 알고 본능적으로 에너지 재분배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도 알고 본능도 알지만 우린 발차기를 놓을 순 없다. 자유형은 정복해야 할 산이요, 다이어트는 인생의 동반자다. 이 두 과업을 위해 다시 한번 발을 구를 수 밖에 없다. 발차기 소리만 들어도 이 사람이 수영을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언젠가 철썩철썩 파도 같은 발차기 소리로 10바퀴는 거뜬히 완주하는 그 순간을 기대하며 오늘도 찰방찰방 나아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