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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맏이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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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Sep 17. 2023

맏이 19. 배를 타고 후퇴


천신만고 끝에 우리 일행은 군자면에 도착했다. 작은 어촌(오늘의 안산 반월공단)이었다. 이미 해는 수평선 너머로 저물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8명이었다. 다행히 소대장(교관)은 우리와 같이 행동을 하게 되었으나 우리는 본대와는 떨어지고 말았다. 타 보병들은 모두 흩어져 어디로 갔을까. 육지로 남하한 모양이다.

우리 일행은 시장끼를 느꼈다. 식사할 민가를 찾았으나 주민들이 피난 간 후인지라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빈집에서 약간의 콩을 찾아 볶아 먹었다. 피로로 지친 후의 요기가 금세 졸음을 불러왔다. 그러나 상황은 급하지 않은가? 포위가 되느냐 탈출을 하느냐 하는 순간이니. 아마 수원은 함락됐을 것이고 정부도 또 이동했을 것이니 말이다. 휴식할 여유는 없는 것이다.

모두들 해변가로 나가 배를 구했으나 동력선은 없고 겨우 무동력선 2톤쯤 되는 배를 발견하고 노질이라도 해서 출발하자고 의견을 같이했다. 어두운 밤이다. 노질을 잘하는 친구가 노를 잡고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으로만 가면 서산반도에 도착할 것이고 그곳에서 대전으로 갈 계획이었다.

배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물마저 없었다. 우리는 열심히 교대로 노질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방향은 남쪽이지만 어디쯤 왔는지, 얼마나 됐는지 속도의 감각도 없다.     

날이 새기 시작했다. 이제 육지가 보일 것이라는 기대로 사방을 살펴보니 이런, 어제 출발한 그곳이 아닌가. 불과 1Km 정도밖에 안 되니 의아했다. 그러나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밤의 밀물 때문에 노질로써는 진출하지 못한 것이다. 모두 苦笑를 금치 못했다.

밤새도록 땀 흘린 것이 헛되게 됐으니 피로는 더욱 누적됐다. 그러나 아침부터 썰물이니 모두들 기운 내자고 다시 노질을 시작했다. 남쪽을 보니 아득히 큰 섬, 작은 섬들이 보인다. 신기하게도 배의 속도감을 느끼면서 오후 늦게 지칠대로 지친 우리는 大阜島에 상륙했다.

주민도 많았고 꽤 큰 섬이었다. 주민들의 표정은 불안으로 꽉 차서 우리에게 상황을 묻는다. 우리는 사실대로 설명을 해주었다. 도착 즉시 부탁한 식사를 했다. 참으로 성찬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며칠 만의 따뜻한 음식인가. 그곳에서도 우리는 잠을 잘 형편이 못 돼 다시 배를 빌려 남쪽으로 향했다. 역시 밤이었으나 밀물과는 상관없으니 안심하라는 것이다.     

얼마나 왔을까. 덕적도를 지나서 날이 새기 직전 당진군의 어느 해변에 닿았다. 재빨리 부락을 찾아들었더니 아주 평화스러운 분위기다. 부락민은 반가이 맞아주었고 아침 식사도 대접받았다. 참으로 훌륭한 대접이었다. 닭도 잡고 흰쌀 밥에 포식을 했다.

식후, 소대장이 앞으로의 복안을 말했다. 안양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났고 그동안 북괴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을 것이니 우리는 빨리 대전으로 가서 본대와 합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때쯤 유엔군이 평택, 오산 지구에 도착하여 첫 작전에 실패했고 이 작전에서 미군이 분산되고 결국 ‘딩 소장’이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는 수모를 당했다.

당진을 떠난 우리는 예산, 천안, 대전으로 코스를 잡고 도보로 행진하면서 예산 쪽을 향하고 있는데 어떤 주민이 우리를 보고 이미 예산에 인민군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놈들 벌써 여기까지 왔구나 하며 우리는 진로를 바꿔 대천, 청양, 대전으로 정했다.

대전은 어떻게 됐을까? 그것도 걱정이었지만 고향에 계신 가족들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모두들 피난 가는데 피난을 가시면 어디로 가실까? 이때부터 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고향으로 먼저 가 봐야 될 것이 아닌가 하고.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우리는 각고 끝에 다음날 오후 대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전은 아직 무사했고 시내는 피난민으로 들끓었다. 시내의 집집마다 가족을 찾는 벽보들이 이곳저곳에 붙어있다. 행선지를 알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순간에도 장사에 혈안이 되어있는 상인들을 보니 인간의 삶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정부는 이미 대구로 이동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본대(후보생)가 충북 보은에 있다고 들었다. 그날로 군용차로 보은에 와보니 모두 보은 양조장에 집결하고 있었고 우리를 반가이 맞으며 한강 폭파 이후의 행적을 묻는다. 우리는 해상으로 왔다는 것과 그동안 상황을 설명했는데 해상으로 온 것은 우리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남들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한 것 같았다. 후보생인 우리는 상부 지시에 따라 일거 대구 경산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은 그날 밤이었다.

보은에도 역시 피난민은 집집마다 가득 찼고 대혼잡이다. 나는 유심히 피난민의 벽보에 관심을 갖고 우리 가족의 소식이라도 있나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멀리 서울에서 피난 온 사람의 벽보도 눈에 많이 띄었다. 밤낮으로 피난민이 오고 또 가고 개중에는 피난 중에 잃은 가족을 서로 찾으며 울부짖는 소리, 소리…. 비참한 피난길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 무렵 나는 배앓이를 시작했다. 당진에 상륙 후 포식한 후유증인 것 같았다. 위가 매달리고 설사는 계속되었다. 약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부대에도 약이 없었다. 굶어도 안 되고 먹으면 탈이 나고. 이 일은 그 후 나의 건강에 많은 지장을 가져왔고 후일, 이 배앓이로 결정적인 제2의 병이 발생할 줄이야.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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