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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Sep 28. 2018

김숨 『한 명』; 단 한 명만이 남게 되었을 때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의 증언, 그리고 우리의 책임

 사건의 유일한 당사자가 죽으면 그 사건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요? 만약 그 사건이 오로지 증언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과거의 일이라면, 우리는 당사자와 그의 증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요? 역사에 남겨진 증언들은 현재에도 계속해서 발언하는 힘을 가질 수 있을까요? 


 언뜻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질문들은 사실 우리의 지금과 가장 밀착된 고민이어야 합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것이니까요. 이러한 질문이 필요한 이유를 강조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낸 작가의 고민이 담긴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김 숨 작가의 『한 명』입니다. 책 맨 앞장에서 밝히듯이 이 작품은 “세월이 흘러, 생존해 계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분뿐인 그 어느 날”을 시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그녀는 위안부의 피해자이지만 국가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이 만주의 위안소에 끌려갔다 왔음을 말하지 못했지요. 조카가 부동산투기 목적으로 사 놓은 주택에 임시로 살고 있는 아흔 여섯의 그녀. 재개발 지구로 거론되는 동네에는 쇠락한 폐허의 분위기가 감도는데, 이 동네에서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숨긴 채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뉴스에서 위안부 생존자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되고 이제 단 한 명의 생존자만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한 명. 그녀는 중얼거립니다. 


 그녀는 위안부로 끌려갔을 당시 고향 지명도 몰랐기 때문에 전쟁 직후 가까스로 목숨을 연명했어도 집으로 곧장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함께 위안부에 있었던 이들의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어쩌면 그들과의 장면 장면은 잊고 싶어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어떤 언어로도 자신이 겪었던 비극을 설명할 수 없었기에, 그 비극을 함께 견뎌낸 그들과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하게 결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기억으로써 살아 돌아온 2만의 생존자와 살지 못한 20만의 가까운 여성들을 그녀 속에 살린 셈이지요. 그러나 그녀는 이제 유일한 생존자가 산소호흡기에 꺼져가는 생명을 유지한다는 소식에 처음으로 고백을 시도합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어서 쩔쩔매던 그녀의 손가락들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
나도 피해자요.
그리고 또 뭐라고 써야 하나? 막막해하던 그녀는, 자신이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 신빙성이 없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위안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리고 다니는 이들을 향해서. 몇 살 때 끌려갔는지, 누구한테 끌려갔는지, 어디로 끌려갔는지 분명히 대지를 못하니까. 고향 지명조차 제대로 모르는 데다, 학교에 다니지를 못해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던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걸 고려도 않고. 수십 년이 흘러 기억들이 토막 나고 뒤죽박죽 뒤섞여버렸다는 걸 모르고. 
 그녀는 만주 위안소 이름은 모르지만, 자기 피와 아편을 먹고 죽은 기숙 언니의 이빨이 석류알처럼 반짝이던 것은 또렷이 기억난다. 삿쿠에 엉켜 있던 분비물에서 나던 시큼하고 비릿하던 냄새도. 검은깨를 뿌린 듯 주먹밥에 촘촘 박혀 있던 바구미의 개수까지도.    
(…)
모든 걸 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억했으면 오늘날까지 살지 못했으리라. *

*김숨, 『한 명』, 현대문학, 2016, p.150-151






『한 명』은 소설 인데도 미주 페이지가 10장입니다. 작가가 위안부 생존자들의 실제 증언들을 직접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증언의 말들이 조각보처럼 엮어 있습니다. 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를 받치고 있는 건 허구보다 더 허구같은 실재의 말들입니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그 때의 사건들이 증언을 통해 말해지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그녀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라는 점은 형식적으로도 실증적으로도 사실입니다. 아마도 한 명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들은 각각 엄연한 개인이지만, 그들이 겪은 고통으로 인해 피해자라는 거대한 공동체,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 말이죠. 


 위안부로서 겪어야 했던 그 예외적이고 엄청난 고통은 사실 그들 자신이 통과하면서도 믿기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증언은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를 벗어난 것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피해자의 증언이 앞뒤가 맞지 않거나 모호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이유로,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충격적인 경험일 수록 이를 서술하려는 사람과 그의 언어는 뒤틀려있고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에게 단순명료하고 객관적으로 증언을 강요하는 것은 또다른 폭력일 것입니다. 특히 고령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는 말이지요. 소설에서도 드러나듯이 세월이 흘러 그들의 의식이 흐려질지라도 위안부에서의 경험은 강렬한 감각과 감정의 조각들로 분열된 채 그들에게 남아있습니다. 그건 그들이 원해서 남겨둔 것들이 아닙니다. 평생에 걸쳐 도망치고 싶은 잔재물에 가깝죠. 그런 기억들을 증언한다는 것은 존재를 내건 용기일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2018년 9월 기준,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27명입니다. 남은 생존자 할머니들의 평균 연령은 90세로, 아마 소설에서 가정된 시기는 금방 도래할 것입니다. 이제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비극을 증언하고 증명하는 일을 요구하는 건 무의미할 지 모르겠습다. 대신 남아있는 자들이 기억하는 일이 더 중요하게 되었지요. 할머니들의 고통스런 증언들이 앞으로도 계속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과거를 청산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정확한 과거 인식과 청산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서 국가에 의해, 권력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들이 다시금 고통을 겪지 않도록 모두가 노력할 때, 이전의 증언들의 현재적인 생명이 부여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건 저희가 이루어야 할 몫이 되겠지요.   





*피해자와 그 증언에 대한 고민은 박민정 작가의 『아내들의 학교』를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이전 포스팅인 <피해자의 말에 대한 우리 모두의 책임> 글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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