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면 백은 아니지만..
나의 경우,
대부분 맞았던 통계가 있다.
외모를 많이 꾸미는 편이고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
혹은 일반적이지 않고 오버한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자존감이 낮은 엄마들이었다.
이들은 예쁘기는 하지만 속은 비어있는..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부러운 존재이지만
속은 추운 겨울이었으리라..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에
햇빛 한 점 없이 모진 바람을 견디는 듯..
그렇게 느껴졌다.
첫째 아이 유치원 시절 어느 날,
우리 집에서 딸아이 친구들과
그 친구들의 엄마들이 모여 논 적이 있었다.
엄마들은 식탁에서 커피를 마시고
아이들은 거실에서 별 탈없이 잘 놀고 있었다.
엄마들끼리 재밌는 수다를 하며
서로 긴장이 풀어지고
익숙해지는 분위기로 바뀔 무렵
한 명의 엄마가 계속 거슬리기 시작했다.
길고 찰랑이는 머릿결에 예쁜 이목구비,
고급스러운 샤넬 재킷,
딱 보면 알 만한 빛나는 까르띠에 시계와
루이뷔통 백까지..
그녀는 누가 보아도 예쁘고 고급스러운
넘사벽의 엄마였다.
나의 육아 스타일은
아이들이 큰 소리가 나지 않는 이상
개입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티격태격이나 작은 갈등 문제의 경우,
아이들이 스스로 해결해 볼 수 있는
혹은 안 좋은 상황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또는 스스로 해결방법을 생각해 보는 기회를 주는 편이다.
그런데
거슬리기 시작한 그녀는
엄마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웃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작은 소리에도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녀의 입은 우아하게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때마침 그녀가 일어났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향했다.
한창 무르익은 분위기가 깨지자
엄마들은 의아한 표정을
서로에게 한 껏 지어 보였다.
별소리가 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예민한 소리를 포착한 모양이었다.
나는 초대자이자 집주인인지라 얼른 뒤따라 갔다.
그리고 들어 버렸다. 듣게 되었다.
그녀가 그녀의 아이에게 말하는 소리를..
아이를 잡고 검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엄마 봐~!
너! 여기 엄마들이 다 듣고 보고 있어. “라고
말하며 아이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그녀와 아이.
이 둘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실은 내 심장이 심상치 않게 뛰었다.
너무 놀랐다.
‘이게 6세 아이랑 나눌 대화일까?’
‘한 두 번이 아닌, 이 익숙한 둘의 분위기는 뭐지?’
설마 집에서도 이렇게 육아를 할까?
그 목소리 톤과 눈빛에서
난 그녀의 알몸을 본 것처럼 느껴졌다.
남의 시선이 중요하구나.
남의 시선이 무섭구나.
그러면 아이도 남의 시선을 먼저 신경 쓰겠구나.
그러면 아이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겠구나.
안타까웠다.
나이가 많은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30대에 육아를 했더라면.. 그랬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경우,
아이의 육아에서 한 발을 우선 빼고
엄마의 자아 키우기를 먼저 해야 한다.
사람이 동시에 두 가지를 같이 하기란 쉽지 않다.
육아에서 두 발을 빼는 것이
오히려 아이 성장에 도움이 되지만,
이러한 엄마들의 성격은 그것이 쉽지가 않다.
모든 것을 자신이 해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육아가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엄마의 좋지 않은 사고방식이나 사상이
아이의 무의식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육아가 오히려 낫다고 할 수 있다. )
육아에서 양육자가
문제 인식을 못하는 것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상처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어릴 적 부모에게 받는
학대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가난일 수도
혹은 장기간의 자격지심이나
가스라이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100% 치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 이렇구나’라는 ‘알아차림’ 만으로도
좋아질 수 있다.
이에, 필자는 가장 쉬운 방법을 제시하고 싶다.
마인드 셋이나 어려운 훈련이 아닌,
당장 바로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필자는 8년 전쯤 항암을 하며
인간의 본성을 느낀 다음
터득할 수 있었다.
화가 나거나 화를 못 참을 것 같을 때,
혹은 나의 무의식이 나를 지배하려고 할 때,
얼른!!!
눈을 감고 두 손으로 눈을 누른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
금방 할 수 있다.
여유가 된다면 이때 호흡도 함께 한다.
이 짧은 사이에
이성이 혹은 자아가 찾아왔다면
숨을 조금 길게 여러 번 하면 된다.
하는 방법 따위 없다.
이걸 명상의 기초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어려운 방법 따위는 생각지도 말라~
중요한 건
내 감정을 잠깐 쉬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빨리 나를 찾는 방법이다.
그다음은 뻔한 얘기지만
내 아이를 대입해보자.
생각하는 대로 된다.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
위의 말은 많은 뇌과학자 혹은 심리학자나
소히 성공한 사람들의 책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내용이다.
다들 알고 있어서
더는 거들지 않아도 될 만큼이지만..
필자는 아이만큼은 ‘엄마의 믿음’이
더욱 절실하다 말하고 싶다.
생각해 보라~
‘내 아이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라는..
그럼 아마 생각을 조심하게 될 것이다.
‘내 아이가 잘 못 되면 어떡하지?’보다
‘내 아이는 잘 될 거야.
조금 돌아갈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잘 될 거야.‘라는
생각으로 바뀌지 않을까?
내 아이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은
엄마의 조바심을 키울 것이며
이것은 아이에게 전이되어
안정되지 못한 감정을 갖게 된다.
그러나
내 아이는 잘 될 거라는 믿음을
엄마가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면..
세상의 한 사람이 온전히 자신을 믿는 것을
느낀다면..
돌아갈 수는 있어도 중도하차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면,
결국 잘 될 아이의 인생을 생각했을 때
내 아이의 하이라이트는 지금이 아니다.
그러나 옆집아이는 지금 일 수도 있다.
지금 하이라이트를 맞은 옆집 아이와
지금 과정 중에 있는 내 아이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등분산일 때 비교가 가능한 것이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비교하지 말라’는
말을 쓰는 시기가
보통 유치원에서 초등 저학년 시기에 많다.
그러다 고학년이 될수록
우리는 아래의 말을 실감하게 된다.
‘인생사 마음대로 안 되는데
그중에 최고가 자식이다’라는..
이거다!
아이 나이가 어릴수록 엄마 나이도 어리다.
욕심이 포기가 안 되는 시기이다.
마치 유치원생이 욕심을 포기하는 방법을 배우듯
우리 엄마들도 자기의 자격지심을
내려놓는 시기가 아이의 유치원 시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유치원 시절에 욕심을 포기하는 방법을 배우고
초등학교를 가면 아이는 학교 생활이
편할 뿐 아니라 인기 있는 아이가 될 것이다.
엄마도 아이 유치원 시절에
자격지심을 내려놓으면
아이를 더 빛나고 단단하게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식초차 못하고 산다.
내가 어떤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나의 자격지심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마치 나의 잘못으로 인정하면 자존감이
지하땅굴로 곤두박질 칠 것만 같다.
부족하지 않은 사람 없고 완벽한 사람 역시 없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격지심이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내가 나를 알고 인정하는 것.
그것부터 시작한다면
그 여정은 오래 걸리지 않을 터이니.
6년이 지난 지금.
위의 그녀는 현재 나의 절친이다.
물론 나보다 너덧 살 어린 동생이지만,
지금 그녀와 나는 자주 만나지 못해도
책을 선물하고 읽은 부분을 밑 줄 그어 가며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아픔에는 내공이라는 것이 따라온다.
상처 혹은 병이 지나가면 내성이 생기듯.
또 그 상처가 치유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듯.
얼마 전
’ 언니! 정말 고생 많았어요.
정말 언니 고마워요. 언니가 내 선생님이에요.‘
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았을 때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예쁜 외모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기품 있는 아름다움과 평안함을
그녀의 자태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끝없는 ‘알아차림!‘
그리고
지나간 수치심보다 앞으로의 발전에 초점을 맞춘
성장하는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녀 덕분에 같이 자란 기분~~~^^
사진: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