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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청바지

꽃보다 청춘

by 둥이

젊은 할아버지

아버지 병원 진료가 있는 날이다. 나이가 들면서 여기 저기 안아픈데가 없을 정도로 병원 다녀오는 날이 잦아지고 있다. 그래도 병원 진료로 예방과 치료가 가능한 것들이여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수 없다. 아버지는 사물이 겹쳐 보이는 증상으로 안과 진료를 받았다. 신경외과 의사는 시신경에 문제가 있는것 같다며 신경계검사와 MRI 검사를 해보자고 지난달 처방을 내렸다. 검사항목 두개의 시간대가 애매한 시간대에 걸쳐 있었다. 우선 처방해준 시간대에 검사를 받을수밖에 없었다.

신경계 검사를 받은 시간은 12시50분 이였다.

접수하고 20여분 기다리니 예정시간 보다 5분정도 빨리 검사를 받게 해주었다. MRI 검사시간은 4시15분 이였다. MRI검사실은 신경계 검사실보다 더 안쪽에 있었다. MRI검사 시간이 4시간 후에나 잡혀 있는걸 보면 MRI 검사 받는 환자들이 그만큼 많은듯 했다. 어디가 아픈 사람이 늘 이렇게 많다는걸 병원에 와서야 알수가 있다.

점심을 먹고 다시 올까 하다가 아버지도 점심 생각이 없다고 하셔서 MRI실로 이동했다. 우선 접수부터 해놓고 바뻐서 안온 사람들도 있으려니 기대해 보기로 했다.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요 접수가 될까요"

"그럼요 중간에 안오시는 분들도 더러 있으니까 접수해놓고 기다리셔도 되구요 식사하고 오셔도 됩니다"


긴머리를 질끈 묶은 간호사가 눈망울을 반짝이며 이야기 한다. 마스크로 가려진 입가에 미소가 번져 오르는듯 마스크가 살짝 올라가며 눈가 주름이 웃고 있었다. 몇마디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기다림의 시간이 지루하지 않을듯 했다. 간호사의 몇마디는 마법사 주문처럼 환자와 보호자의 감정을 휘감는다. 점심시간 무렵인데도 몇몇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보호자와 같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자분 심장 수술 하신적 있으신가요"

"심혈관질환이 있어서 스텐트 삽입수술 받으셨어요"

"목거리 반지 금속물질 다 빼주시고 옷 갈아입고 기다려 주세요"


검사실에 대기자들은 통넓은 베이지색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검사실 쇼파에 앉아 있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와 같은옷으로 갈아입고 앉아 있으니 뒷모습만 보면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안되었다. 옆에 앉아있던 할아버지는 중년의 딸이 음료수에 빨대를 꽂아서 건내주고 있었다. 늙은 아버지를 살뜰히 살피는 딸의 행동 하나 하나가 조심스러웠다. 서로에게 의지하는 사람들만이 빚어내는 몸에 배인 익숙한 균형감이 그들에게 뿜어져 나왔다.


"아빠 고생하셨어요 이거 드세요"


딸의 눈길은 아버지를 쫒고 있었고 아버지의 한손은 딸의 손을 찾아 더듬고 있었다.

피부를 맞닿는것, 상대의 온기를 몸으로 느끼는것, 서로의 모습을 까만 눈동자에 담아내는것,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 이런 모습들로 지금 내 옆에 부녀는 존재해 있다. 희끗 희끗한 머리를 긁적이며 빨대를 입으로 가져간 할아버지는 아이가 젖을 물듯 쭉쭉 소리내어 들이킨다.


그사이 아버지가 MRI실로 불려 들어갔다. 예약시간보다 빨리 검사를 받아볼수 있었다. 일찍 와서 기다린 보람인지, 친절한 간호사 덕분인지 시간을 아낄수 있었다.


삼십여분 지났을 때였다. 누런 환자복을 벗어던진 할아버지가 탈의실에서 걸어 나왔다.


방금전까지 옆자리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 할아버지가 맞나 싶을만큼 할아버지의 화사한 옷들이 한 노인을 청춘으로 만들어 놓았다.


복숭아뼈가 살짝 보일만큼 운동화 위로 접어 올린 데님 청바지, 너무 진하지도 않은 푸른 빛깔의 청바지, 넓지않은 바지핏에 유행을 타지않은 엷은청색 빛깔의 청바지 그것도 바짓단을 두어번 접어 올린, 청바지에 맞춰 입은듯한 하늘색 셔츠와 바짓단 속으로 집어 넣은 셔츠의 앙상블, 양말이 살짝 보이는 하얀단화 까지 어디하나 흠잡을 때 없는 완벽한 패션이었다. 아마도 저정도로 차려 입으려면 딸의 의지와 할아버지의 남다른 패션감각이 꼭 필요 했을것이다.

청바지와 하늘색 셔츠에 딱 알맞은 검은색 뿔테 안경까지 ᆢ누구에겐 작정하고 차려 입어야만 가능한 패션을 너무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패션감각은 그가 가진 전부를 빛나게 해주는듯 했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 보았다. 늘 저렇게 입고 다니는걸까 궁금해졌다.


뒤를 이어 아버지가 나왔다. 방금전 까지 같은 누런옷을 입고 있었을때는 아버지가 조금 더 절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청바지와 하얀셔츠가 가진 패션의 힘은 무시할수가 없었다. 지난주 아버지 옷을 사드렸던게 생각났다. 여러벌의 옷을 벗고 입어보면서 그 연세 아버지에 어울릴만한 옷으로 사드렸다.


불현듯 언제가 한번은 꼭 저 할아버지 처럼 청바지와 하늘색 셔츠 하얀 운동화를 신겨 드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젊음이 그냥 오는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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