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을 샀다.

by 허아른



어떤, 책을 샀다.


집에 가는 길에 언제나 무심코 들르던 헌책방에서였다. 호기심에 들러서 책장을 훑어보는 나 같은 손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그런 헌책방. 매일 같은 책이 같은 순서로 꽂혀 있고, 그런 책장을 둘러보며 어제와 같은 일상에 안심하는 고작 그뿐인 공간.


그런 공간에, 어느 날 갑자기 못 보던 책이 꽂혀 있었다. 표지도 제목도 없는 까만 책. 기묘한 책이었다. 책이라고 부르기보다 노트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두께. 그 얇은 책 한 권이, 일상에 균열을 내며 나타났다.


나는, 그 책을 샀다.


왜 샀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내 손이 그 책을 집었고, 책장에서 뽑았고, 그 책이 나를 찾아왔고, 나는 자연스럽게 손님을 맞았을 뿐, 이라고 말하면 이상할까.


집으로 돌아가 책을 펼쳐 들었다. 표지가 두꺼운 편이라 예상보다 페이지 수가 더 적었다. 20페이지 정도. 그나마도 앞부분 10페이지가량은 그냥, 먹지였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까만 종이. 그 까만 종이를 다 넘기고 나면, 얼룩덜룩한 다음 페이지에서 느닷없이 이런 문장이 나타난다.


"너무 많아졌다. 이젠 어쩔 수 없다. 계속 쓰는 수밖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문장에서 느껴지는 아주 작은 불길함에 홀려, 뒤를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상했다. 서술도 이상하고, 인쇄 오류인지 자음과 모음이 따로 노는 글도 있었다. 소설 같기도 하고, 일기 같기도 하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이 책을 쓴 저자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읽다 보면. 계속 읽다 보면. 점점 나는 저자에게 공감하게 되었다. 한점 티 없이 검은, 묵직한 늪 아래로 천천히 녹아들어 가는 것처럼. 시공간 건너편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눈에 들여다보였다.


작가는 뭔가에 쫓기고 있었다.


뭔가 많은 것, 이를테면 까만 벌레 같은 것들. 그것들이 글을 쓰는 작가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몸에 번졌다. 신경과 근육으로 파고들어 가, 계속 책을 쓰게 만들었다. 그래서 쓸 수밖에 없었다.


쓰면 쓸수록, 그것들은 더 많아졌다.


종이에 먹이 번지듯이 늘어났다.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발자국 소리가 다가올수록,


벌레는 저자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마지막 페이지는 문장을 완성하지 못한 채 끊겨 있었다. 쓰지 못하게 되었으리라. 작가는 아주 까맣게, 번져버렸을 것이다. 이 책의 앞페이지들처럼.

여기까지 와서야 그 벌레 같은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것은, 글자들이었을 것이다. 아니, 반대로 그 글자 같은 것들의 정체가 벌레 같은 것이었을지도.


하지만 너무 많아졌다. 이젠 계속해서 읽는 수밖에 없다.


내 손에 있는 책은 뒤표지까지 모두 까매졌다. 상관없다. 다시 읽을 필요는 없으니까. 이미 나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을 이해했다. 내가 읽지 않은 앞부분까지. 그리고 이제 내가 써야 할 내용에 대해서도.

그래, 이 책의 첫머리는 분명 이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떤, 책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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