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추섭동(綿秋涉冬) 1

(수정)

by 몽중몽
綿秋涉冬 : 가을을 거치어 겨울을 지남.


*


새벽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시각, 영 승상은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궁궐을 덮었던 안개는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으나, 원인 모를 서늘한 한기는 여전히 주위를 맴돌았다. 돌계단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귓가를 때렸다.

편전에 들어서자마자 영 승상은 살며시 미간을 구겼다. 이미 자리한 대신들 사이, 소 태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승상은 자리를 잡으며 태사와 눈을 마주쳤다. 백발의 노인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이윽고 영안제가 들어서자 관료들이 일제히 예를 올렸다. 황제는 느긋한 움직임으로 옥좌에 앉았다.



공물 납부 기한, 지방 수령 교체, 변방 보고 등

황제는 크지 않은 일들을 차례로 거론하였고 관료들은 각자 소관에 따라 답하거나 의견을 보태었다. 그렇게 익숙한 흐름에 따라 논의가 흘러가던 중, 황제가 문득 화제를 돌렸다.

“병부상서가 부임한 지 한 해가 넘었소,”

편전에 미묘한 긴장이 흘렀다.

“지난 일 년여 동안 군정(軍政: 군사행정)을 다스리며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소. 변방의 둔전을 정비하고, 군량 관리도 예년 이상으로 투명해졌다 하니 가상하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병부상서 낙빈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손이 살짝 떨렸다.

황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담담히 이었다.

“이에 이번에 공석이 된 추밀원사(樞密院使)*의 자리에 제수하고, 판병부사(判兵部事)**로 삼아 병부를 아울러 담당하도록 하고자 하오.”

홀(笏)을 쥔 영 승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승상은 냉랭한 눈빛으로 좌우를 훑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다들 황제의 기색을 살피며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마침내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나섰다.

“폐하, 소신이 감히 한 말씀 아뢰겠나이다.”

“하시오.”

“이 일은 신중히 결정하셔야 할 일이옵니다. 추밀(樞密)*이 병부의 판사(判事)**가 되었을 때, 어떤 이는 사사로운 생각을 품었고, 어떤 이는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였사옵니다.”

“병부의 상서직을 겸임한 전례는 많지 않은가.”

황제가 느린 어조로 답했고 곧바로 형부시랑이 동조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렇습니다. 선제(先帝) 즉위 초에도 한동안 추밀이 병부를 겸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 북방 이족(異族)의 침입을 훌륭히 막아냈사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권한을 틀어쥐었던 이들 중 한 명은 결국 사병을 길러 역심을 품지 않았사옵니까? 그 이후 병부의 상서직을 겸임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황제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고 호부시랑이 다시 나섰다.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선제 시기에 문제가 되어 사사(賜死)된 것은 그 한 명뿐이었고 다른 이들은 분수를 지키며 충실히 제 할 일을 하였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제도가 아니라 그 권한을 남용한 사람이었지.”

황제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분명했다.

“제도는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오. 병부상서는 이미 여러 차례 그 충성심을 증명하였소.”

낙빈은 고개를 숙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이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하오나…….”

이부상서가 나섰다.

“지금까지 병부상서였던 이가 판병부사가 되어 거느리던 부하들을 그대로 지휘하면, 병부의 관리들이 어찌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하겠습니까?”

“다른 다섯 부의 상서직을 재추(宰樞; 재상과 추밀)들이 겸할 때는 그런 말이 없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공부상서가 반박하였으나 이부상서는 물러나지 않고 이어갔다.

“병(兵)은 군사에 관련된 일이니 지극히 조심하여야 합니다. 병부에서 군정을 다스리고 추밀원(樞密院)**에서 기밀을 주관한다면, 나라의 모든 칼자루가 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형국이옵니다. 염려되는 바가 없지 않사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역모 사건 이후 병부의 겸임 사례가 없었던 것 자체가 선제(先帝)의 뜻이 아니었겠습니까.”

선제께오서는 인재가 없어 행하지 않으신 것이지 제도를 없애신 것이 아닙니다.”

편전의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영 승상은 간간히 소 태사를 바라보았다.

태사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의 눈길이 낙빈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황제에게로 옮겨갔다.

그것을 알아차린 듯, 황제는 천천히 눈을 돌려 소 태사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묵직한 시선이 닿자, 소 태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느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신료들의 우려는 이해할 만하옵니다.”

모든 시선이 노신(老臣)에게 쏠렸다.

“단 한 명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는 것이겠지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신중하게 이었다.

“한 사람이 군정과 기무(機務)를 모두 장악한다면, 만에 하나라도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잘못된 판단을 하였을 시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사옵니다.”

영 승상의 눈빛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러나…….”

소 태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병부상서는 이미 그 능력과 충성을 증명하였사옵니다. 폐하께서 맡기신 중임을 당장은 무리 없이 감당하리라 믿나이다. 더욱이…….”

소 태사는 잠시 신료들의 면면을 훑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이어갔다.

“병부시랑은 젊으나 유능하다 하옵니다.”

그는 황제를 향해 공손히 말했다.

“당장은 추밀원사가 병부상서를 겸하되, 병부시랑에게 차차 실무를 맡기시어 1, 2년 내로 병부상서로 승진시키심이 어떠하옵니까? 그리하면 추밀원사는 추밀원의 일에 전념하고, 병부는 새로운 상서가 맡게 되니 우려도 사라질 것이옵니다.”

영 승상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결국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깊이 읍(揖)하여 말했다.

”폐하, 신이 우려하는 바는 병부상서의 충성심이 아니옵니다.”

승상의 목소리는 공손했으나 단호했다.

“낙 상서는 병부에서 직접 군무를 다스린 지 불과 일 년여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아직 병부의 실무에 익숙해지는 과정인데, 추밀까지 겸한다면, 두 직무 모두 소홀해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승상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게다가, 추밀과 병부를 한 손에 쥔 자가 생기면, 그 아래 조정의 논의가 어찌 자유로울 수 있겠사옵니까. 신하들이 소신껏 간언 할 수 있는 조정을 만드시는 것이 폐하의 뜻이 아니었사옵니까.”

그는 시선을 소 태사 쪽으로 돌렸다.

”태사께서 제안하신 바는 온당하오나, 병부시랑 역시 독립적인 판단을 내리기에 아직 경험이 부족하옵니다. 결국 추밀원의 그늘 아래 병부가 움직이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겠습니까.”

이부상서가 승상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대대로 재추의 반열에 오르려면 응당 거쳐야 할 공로와 세월이 있었습니다.”

“능력과 충성심이 검증된 자에게 중책을 맡겨 장래를 대비하는 것이, 경솔한 인사로만 보이는 것인가?”

황제는 노기 서린 어조로 반문했다.

그간 추밀원의 군령(軍令)과 병부의 집행이 따로 움직여 군의 사기가 무너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소. 그러니 이제 그 둘을 하나로 모아 지휘케 하려는 것이 아닌가.”

승상은 여전히 정색한 표정 그대로, 어사대의 관원들 쪽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어사대의 관원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폐하, 아뢰기 송구하오나……병부상서의 역량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지난해 초 변경에서 탈영한 무리들이 도적이 되어 사찰을 불태우고 약탈을 자행한 일이 있지 않았나이까. 그 토벌이 지체되어 민심이 흉흉하였사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낙빈은 잠시 어깨가 움직이는 듯하였으나 곧 미동 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전임 병부상서 재임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낙 상서는 부임 즉시 그 일의 수습에 전념하여 더 큰 화를 막았사옵니다.”

즉시 반박이 나왔으나 어사대에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석 달이나 걸렸지 않습니까? 그 사이 얼마나 많은 백성이 피해를 입었는지를 생각하면, 수습을 했다는 것만으로 공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해당 건으로 여러 차례 병부상서에 대한 탄핵의 논의가 있었습니다. 하온데, 도리어 과분한 직위를 한꺼번에 내리시니 이는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기강을 무너뜨리다니 지금…….”

형부시랑이 언성을 높이려는 순간, 황제의 차가운 목소리가 대화를 잘랐다.

“그 건은 이미 짐이 마무리한 것이 아니었나.”

논쟁을 하던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어사중승이 자신의 부하에게 짧게 눈짓을 하였다. 눈짓을 받은 관원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뒤로 물러났다.

잠시 조용해진 사이에 누군가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논의를 바라보고만 있던 대리시경(大理寺卿)의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확실히…….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나이가 젊으면 그 자리가 도리어 독이 될 수도 있는 법이지요.”

옆 사람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하필이면 격렬하던 언쟁이 잠시 잦아든 찰나였다.

“예전에 저희 쪽에서도 그러한…….”

말을 마치고 나서야 그는 흠칫하였다.

편전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동료가 대리시경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고 대리시경은 얼굴이 납빛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몇몇은 승상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나 영 승상은 잠시 굳은 표정이 지나갔을 뿐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이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제 자식이 젊은 나이에 과분한 직위에 올랐다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것을 곁에서 뼈저리게 지켜보았습니다. 부모로서 그보다 가슴 아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이 끝나고 짧은 침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한 경험이 있기에, 신은 병부상서 또한 제 아들과 같은 전철을 밟을까 걱정하는 것이옵니다.”

승상은 황제를 향해 다시금 허리를 숙였다.

“낙 상서 역시 그릇을 먼저 키운 후에 중책을 맡겨도 늦지 않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주위가 조용한 가운데, 낙빈의 몸이 굳어졌다.

대리시경은 무언가 입을 열고자 했으나, 황제가 먼저 손을 들었다.

“그만.”

옥음(玉音)은 낮고 차분했으나, 거기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오늘은 이만 하는 것이 좋겠소.”

황제는 잠시 승상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모두 생각해 보도록 하고, 내일 다시 의논하도록 하겠소.”

신료들은 일제히 엎드려 예를 올렸다.

승상은 황제의 얼굴을 읽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영 승상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편전을 나섰다. 다른 관료들도 제각기 생각에 잠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사공과 병부상서 대인께서는 남으십시오. 폐하께옵서 두 사람을 부르셨나이다.”

승상은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소 태사와 낙빈이 다시 편전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찬 기운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승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


소 태사가 편전으로 들어서자, 낙빈은 이미 황제 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태사는 낙빈의 옆으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둘 사이에는 두 걸음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제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고, 스승 역시 그를 보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편전은 다시 외부와 끊어졌다.

“소 공.”

황제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소 태사는 예를 올리고 자리에 섰다.

“오늘 일은 미리 귀띔하지 못하였소. 서운하였겠지.”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국정은 폐하의 결단이옵니다. 신은 다만 의견을 올릴 뿐이옵니다.”

“그래도…….”

황제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대는 아까 신료들의 우려가 이해된다 하였소.”

소 태사는 침착하게 답했다.

“그들의 우려 자체는 옳사옵니다. 폐하.”

황제의 시선이 잠시 낙빈에게 향했다가 다시 태사에게로 돌아왔다.

“흠…….”

“군권이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에는 확실히 위험한 부분이 있사옵니다. 그것이 충신이든 간신이든.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나이다.”

“그렇다면 그대는……진심으로 우려하는 것이오?”

황제의 질문에 날이 서 있었다.

“우려는 진심이옵니다. 그러나…….”

소 태사는 흔들림 없이 답했다.

“승상의 사람들이 사직을 걱정하여 그리 말한 것은 아니겠지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신은 겸직 자체가 위험하다는 우려에는 공감하되, 당장은 믿을 수 있는 낙 상서가 맡고 병부시랑이 경력을 쌓는 동안 기다리자는 안을 아뢴 것이옵니다.”

“그렇군.”

“임시로 겸직하는 것까지는 끝까지 반대하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병부시랑 역시 폐하의 충직한 신하. 1, 2년 후 그 사람이 상서가 되면, 그때는 분리하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이옵니다.”

잠시 생각하던 영안제는 낙빈을 향해 물었다.

“낙 상서.”

“예, 폐하.”

“그대를 중히 쓰고자 했는데,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소.”

“소신이 부족하여…….”

낙빈이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크신 뜻을 막은 듯하여 송구스럽기 그지없나이다.”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오.”

황제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그대 탓이 아니오. 조정의 형세가 그러할 뿐이지.”

말을 하며 황제는 낙빈과 소 태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 다 시선을 흩뜨리지 않았다. 오직 황제에게만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황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러나 곧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내일부터 간관(諫官)들이 시끄러워지겠지. 벌써부터 귀가 따갑소.”

“간관들의 의견은 존중하셔야 하옵니다, 폐하.”

소 태사가 말했다.

황제의 입가에 설핏 찬 웃음이 지나갔다.

“그대가 그리 말하니 서운하오.”

“그들의 말은 직분에서 나온 것이옵니다.”

소 태사는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옳으면 옳은 대로, 그르면 그른 대로 취할 것이 있나이다. 널리 들으시는 것이 옳사옵니다.”

황제는 잠시 태사를 응시하다가 나직하게 웃었다.

“알겠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승상이 내일 다시 반대할 것이오. 아마 더 격렬하게.”

“그러할 듯합니다.”

황제가 낙빈을 보며 물었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낙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승상은……뜻이 확고한 사람이옵니다.”

“확고하다는 것은 고집스럽다는 뜻이기도 하지.”

황제가 다시 낮게 웃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가 생각이 나는데, 말이오.”

소 태사와 낙빈이 동시에 황제를 바라보았다.

“승상의 막내아들이 상을 마치고 임관할 시기가 내년이라 하였지.”

황제는 낙빈을 바라보았다.

“병부의 자리를 원한다 들었소.”

“그렇사옵니다. 주사(主事)로 들어올 예정입니다.”

낙빈이 답했다.

“병부라…….”

황제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소 태사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말했다.

“승상이 병부상서의의 승진을 막는데, 그 아들이 병부상서의 밑에서 일하게 된다면…….”

말투는 담담하였으나,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서로에게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니겠소?”

“하오나…….”

낙빈은 망설이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승상이 자식의 직위 하나 때문에 이런 중대한 일에서 물러날 리는 없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렇겠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소 태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군과 스승을 바라보던 낙빈의 어깨가 굳었다.

“자식들의 관직을 보장받는 것은 대신들의 오래된 관례이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

“이를 방해하는 듯 비치게 하신다면, 다른 신료들까지 폐하를 두려워할까 염려되나이다.”

“알고 있소, 알고 있어.”

황제는 다시 혀를 찼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그저……. 방법을 생각해 보고 있을 뿐이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길은 있어야 하지 않겠소.”

황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다시 소 태사를 보았다.

“중요한 고비가 아닌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가능한 사용하는 것이 좋겠지.”

“지나치게……서두르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소 태사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천하의 묘수도 때를 잘못 고르면 악수가 되고, 평범한 수라도 시의적절하면 판을 결정지을 수 있는 법이옵니다.”

“확실히 그렇지.”

황제는 낮게 웃었다.

“먼저 간관들이 어찌 나올지 지켜보아야겠지. 태사도 신중히 살펴주시오.”

“명을 받들겠나이다.”

황제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말했다.

“승상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오.”

“그리 짐작하옵니다.”

낙빈이 조용히 답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황제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그대도 준비를 하시오”

낙빈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편전 안에는 낮은 이야기 소리가 이어졌다.

창밖의 하늘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으나 이야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왔다. 조회가 끝난 지 한 시진이 지났다.

승상부 대문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발을 내딛는 영 승상의 안색은 어두웠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있었다.

“아버님, 다녀오셨습니까?”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사와 영유가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승상은 고개만 끄떡였다. 제대로 된 대답도,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두 아들은 일순 얼어붙었다. 영사가 동생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영유는 고개를 돌렸다.

주변의 하인과 식객들도 당황한 기색으로 서로 눈치만 보았다.



영 승상은 빠른 걸음으로 본채를 향해 걸어갔다.

“대인.”

추홍이 얼른 다가왔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까 몇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사랑채에서 대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승상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이런 때에 무리 지어 드나들다니.”

목소리는 낮았으나 날카로웠다.

“예……?”

추홍이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우리가 당황했다는 것을 온 조정에 알리고 싶은 모양이군. 그 사람들은 생각이 있기는 한 것인가?”

“…….”

추홍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두 돌려보내게. 그리고 부(部)의 막료들을 불러오게.”

승상은 다시 걸음을 옮기다가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애들도 불러오게,

“예, 대인.”

추홍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정원에는 찬바람만이 불었다.

영사와 영유는 사랑채에서 조금 떨어진 정원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두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니 식객들과 호위 무사들도 그대로 정원 한편에 서 있었다.

영사는 팔짱을 낀 채 사랑채 쪽을 바라보았다.

영유는 형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영유의 곁에는 낙리가 함께 서 있었다.

낙리는 영유를 바라보는 듯하면서 간간히 사랑채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사랑채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몇몇 관복 차림의 인물들이 나왔다. 승상을 찾아왔던 이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실망과 당혹감이 역력했다.

“도련님들.”

그들이 지나가며 간단히 인사를 하였다.

“오래간만입니다.”

“편히 가십시오.”

영유가 공손하게 답례했다. 영사도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관리들이 대문을 향해 걸어가며 서로 고개를 맞대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빨리 의논하여…….”

“……간관들을…….”

“……병부상서는 곧바로…….”

바람에 실려 오는 말소리들은 단편적이었으나 대략의 뜻은 짐작할 수 있었다.

영사는 그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동생을 힐끗 보았다. 영유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들.”

추홍이 다가왔다.

“대인께서 사랑채로 오시라 하셨습니다.”

“알겠네.”

영사가 반색을 하며 답했다가, 이내 추홍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왜 저 아이까지 부르시는가?”

그는 턱으로 영유를 가리켰다.

“조정일을 의논하는 자리에 아직 약관도 안 된 아이를 왜…….”

“대인께서 도련님들께 이르실 말씀이 있어서 부르신다 하셨습니다.”

추홍은 부드럽게 말했다.

“모두 오시라 말씀하셨습니다.”

영사의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더 말하지 않았다.

영유는 가만히 낙리를 돌아보았다.

“너는 별채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돌아가기 전에 글 선생이 오시면 잘 설명해.”

“알겠습니다. 도련님.”

낙리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두 형제는 나란히 사랑채를 향해 걸어갔다. 침묵만이 둘 사이를 채웠다. 영사의 발걸음은 빨랐고, 영유는 반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낙리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관리들이 사라진 대문 쪽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사람들이 떠나고 나자 정원은 다시 고요해졌다. 다만 사랑채 창문 너머로 희미한 불빛만이 새어 나왔다.



* 추밀원(樞密院) : 왕명의 출납과 숙위(宿衛), 군사기밀 등을 맡아보던 관청.

추밀원의 고위 관원을 추밀 혹은 추신(樞臣)이라 한다.

추밀원사(樞密院使) : 추밀원에 속한 종이품 벼슬.


** 판병부사(判兵部事) :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

판사(判事)는 재상급 고위 관료가 상서육부의 관직을 겸할 때 설치되는 해당 부서의 으뜸 벼슬

부서명을 넣어 판(상서)○부사로 불렀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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