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마다 흰 눈이 쌓인 창덕궁에서 사헌부 관원들 몇이 나왔다. 잠시 후 새앙머리를 붉은 댕기로 묶은 생각시가 보였다. 3년 만이었다. 단봉문을 넘어서 나온 생각시는 어느새 열다섯의 소녀였다. 생각시를 발견한 호산월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르신! 개성에서 돌아오신 겁니까?”
“정월 대보름이기도 하고, 이것저것 해야 할 일도 있어서요. 무탈하셨소?”
“예. 그럼요. 제가 지밀로 옮긴 것은 아시지요? 녹봉도 많고, 궁인들도 대우를 해준답니다. 제조상궁 마마도 저를 예뻐하셔서, 심부름은 저만 시킵니다.“
생각시가 장옷 안에 든 편지를 보여주자, 호산월의 눈빛이 잠시 날카로워졌다.
“같이 갑시다. 가는 길에 물을 것도 있고, 들을 것도 있고, 할 일도 있다오.“
생각시는 3년 만에 보는 호산월과 나란히 걸으며 연신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바람에도 뺨이 창백하고, 눈동자는 언 호수 같았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생각시를 향해 봄볕 같은 미소를 띠었다.
“계해년의 소원은 빌었소?
“예. 부모님 건강하시고, 오라버니들이 역관 시험에 붙게 해 달라 빌었지요.”
“잘했소. 그런데 혹시 계해년의 뜻을 아시오?”
호산월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생각시는 갸웃하고 올려다보았다. 호산월은 천천히 기억하기 쉽게 말을 이어갔다.
“계(癸) 자는 천간의 마지막 글자로서, 북방을 뜻하고, 겨울을 뜻하지요. 이 계 자가 해(亥) 자를 만나면, 큰 바닷물을 뜻한답니다.“
생각시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이 해자는 돼지를 나타내는데, 돼지를 뜻하는 말이 또 뭔지 아시오?”
“돈 자가 있고, 시 자가 있습니다.”
호산월이 빙그레 웃으며 생각시를 내려다보았다.
“맞소. 다른 글자는 살아있는 돼지를 그대로 형상화했는데, 해 자는 죽이고 머리를 잘라내 도축한 돼지를 의미합니다.”
“그럼, 계해년은 큰 바닷물에 죽은 돼지가 떠내려가는 것입니까? 까르르르….”
웃음소리를 따라 나풀대던 다홍색 치마가 멈췄다. 종루 앞으로 지나가는 수레에 피가 범벅이었다. 소가 끄는 수레 위에는 몸의 반이 뜯기고, 조각난 남자들의 시신이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호랑이를 만난 모양이오.”
“옷을 보니 군사들 같은데, 어쩌다 저리 되었을까요?”
“1년의 반은 사람이 호랑이를 사냥하러 다니고, 남은 1년의 반은 호랑이가 사람을 사냥하러 다닌답니다.”
호산월은 육조거리 쪽으로 가는 수레를 불러 세웠다.
“나으리, 범 사냥을 한 것입니까?”
“인왕산에서 내려와 소도 잡아가고, 사람도 잡아간다고 해서 토벌하러 갔다네.“
“총포를 쓰지 않았습니까? 어쩌다 이리된 것입니까?”
“생포를 하려다 이리되었지. “
호송 포졸들이 육조거리를 향해 움직이고, 호산월은 무거운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생각시를 향해 돌아섰다. 생각시는 겁먹었는지 멀찍이 있었다.
“잠깐 어디 좀 들렀다 갑시다.”
정월대보름을 맞아 거리 곳곳은 상인과 손님들로 북적였다. 먹을 것도 없고, 역병이 돌던 겨울을 보내고 곧 봄을 맞이할 생각에 사람들 얼굴마다 따뜻한 기운이 돌았다.
광통교를 지나 호산월이 작은 점포 앞에 섰다. 점포 주인은 거적 위에 앉아, 거울을 돌에 갈아가며 윤기를 내고 있었다. 거울의 광을 내느라 쓴 들기름 냄새가 골목 안에 가득했다.
“계시오?”
청동거울을 닦고 있던 마경장 권 씨가 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주름지고 거무튀튀한 얼굴의 마경장 권 씨가 호산월에게서 생각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옥서 신 참봉의 막내 따님이세요.“
“아아 ~ 그렇구먼.”
생각시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인가 하고,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를 했다. 호산월은 뿌듯해하며 품에서 붉은 천으로 싼 것을 꺼내 마경장에게 건넸다. 붉은 천 안에는 백동 거울이 들어있었다. 마경장이 백동거울을 살피며 물었다.
“오라비들이 사역원에 있다지? 아기 항아님의 생각은 어떠한가? 한학을 배우는 것과 여진학을 배우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이득인지 말이야.”
생각시는 당황하여 호산월을 바라보았다. 호산월은 귀여운 강아지를 바라보듯 생각시를 내려다보며 그 대답을 기다렸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큰 오라버니는 한학을 배우고, 작은 오라버니는 여진학을 배우니 제가 어느 쪽이 더 좋다 하면, 다른 한 분이 서운하실 것 같아서요.”
생각시의 말에 호산월의 입꼬리가 올라가고는 개울물 소리 같은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맞소. 설날에 떡국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고, 단오에는 그네를 탈 수 있으면 다행이고, 상원에 뜨는 커다란 만월 아래서 다리밟기를 하고 이명주를 마시면 족하지요. …한 바퀴 돌다가 올 것이니 잘 닦아놓으세요.“
호산월은 생각시를 데리고 종루를 지나 북촌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수레가 지나가며 떨어트린 사람의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어르신도 호랑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있지요. 아버지께서는 호랑이를 잡던 착호갑사였소. 호랑이를 잡으러 가는 날에는 호랑이 똥을 몸에 바르고, 호랑이 고기를 먹었다오.”
“살아있는 호랑이도 보았습니까?”
호산월은 잠시 머뭇하다가 멀리 보이는 북촌의 기와집들을 보며 대답했다.
“전쟁에 아버지께서 의병으로 가고, 어머니와 둘이 산속에서 살 때였소. 어느 날 아버지가 밖에서 부르더이다. 은섬아! 은섬아!”
생각시는 귀를 쫑긋하고 호산월의 말을 들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밖으로 나오지 말라며 혼자 나가셨지요. 며칠이 지나도 밖으로 나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오.”
호산월의 말은 북촌의 담 높은 기와집 골목을 걸으면서도 계속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문 밖에서 애절하게도 부르더이다. 은섬아! 은섬아!”
“어머니였습니까?”
호산월이 북촌의 어느 기와집 앞에 멈춰서 생각시를 내려다보았다.
“문풍지에 구멍을 뚫고 밖을 보니, 피투성이의 어머니가 서 있었소. 그런데, 어머니는 이미 커다란 호랑이의 먹이가 됐고 창귀가 되어, 호랑이의 새로운 먹이를 찾고 있었다오. 그것이 어머니였다면 딸의 이름을 불렀겠소? 창귀이니 먹이의 이름을 불렀지요.”
생각시는 눈을 깜박이다가 쓸쓸한 얼굴이 되었다.
“불쌍한 귀신이네요.”
”창귀의 창이라는 글자에는 길을 잃고 갈팡질팡한다는 뜻도 있소.”
“호랑이가 시키는 대로 하는데 갈팡질팡은 이해가 안 됩니다.”
“제 뜻이 없으면, 남이 시키는 대로 살면, 남의 도구가 되면, 갈팡질팡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 거울을 닦아서 제 모습을 수시로 살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사람인가? 혹시 내가 지금 창귀는 아닌가?”
호산월이 무서운 얼굴로 놀리듯이 말하자, 생각시가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생각시는 기와집의 문을 바라보고는 웃음을 멈추고 몸을 바로 세웠다.
“편지만 전하고 바로 나오겠습니다.”
“아기씨!”
생각시를 부른 호산월이, 깊이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두려움은 호산월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누구도 보지 말고, 어떤 소리도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눈을 감고 있어야 합니까?”
호산월의 말에 생각시가 웃으며 대꾸했지만, 호산월의 표정은 더욱더 무거워질 뿐이었다.
“아니요. 눈을 잘 뜨고 있어야 안 볼 수 있고, 귀를 쫑긋 열고 있어야 듣지 않을 수 있답니다. 아시겠어요? “
말을 다 들은 후에야 생각시는 자신이 든 편지를 보고, 기와집 문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이 내려온 생각시를 향해 호산월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가는 길에 호두 정과를 사줄게요. 떡과 연등을 사서 용궁맞이도 가고 사자놀이 구경도 합시다.”
그제야 생각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산월은 내년이면 계례를 올리는 생각시가, 커다란 기와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았다.
밝은 빛으로 가득한 듯하지만, 음습한 침묵으로 둘러싸인 기와집 앞에 서서 호산월은 하늘에 뜬 창백한 해를 바라보았다. 겨울밤에 뜨는 달보다도 차갑고 빛나지 않는 해를 바라보다가, 담 위로 솟은 매화나무를 보았다. 아직 꽃 피지 않은 구불구불한 나뭇가지를 보며 호산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창귀야, 어느 곳에 숨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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