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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百鬼夜行

by 김사과 Mar 10.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문갑 너머의 창을 열었더니 약 달이는 냄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호산월은 약냄새를 맡으며 까만 밤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달이 없었다. 대신 별채 담장에 핀 능소화가 제등의 불빛을 받아 노을처럼 붉었다. 새들도 둥지에 앉아 쉬는지 울지 않았고, 연못가에서 반딧불이 몇 마리만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여름밤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어린 의녀의 목소리에 창밖을 보던 호산월이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연 의녀는 약그릇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 여름 더위에도 호산월의 기침이 낫질 않자, 행수 기생이 뒷돈을 주고 부른 혜민서 의녀였다.


의녀는 호산월 앞으로 와 쟁반을 내려놓고 앉았다.        방금 짜낸 약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을 보고, 호산월은 의녀를 찬찬히 살폈다. 스무 살이 채 안 된 어린 의녀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눈을 갖고 있었다.


“드세요. 다 드시면, 맥이 어떤지 보겠습니다.”     


하지만 호산월은 약그릇을 내려다볼 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의 밤하늘을 보았다. 호산월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 의녀도 따라서 하늘을 보았다.     




“달이 없지요?”          


호산월의 말에 의녀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의녀를 바라보는 호산월의 표정이 따스했다. 보고만 있으면 어머니 같은 친근함마저 느껴졌다. 어머니를 떠올리자, 의녀의 표정은 다시 굳었다.     


“그믐날이라 그렇답니다. 그믐의 달은 새벽에나 잠깐 볼 수 있거든요. 의녀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달 이야기를 하던 호산월이 갑자기 이름을 묻자, 의녀는 당황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눈이 잠깐 약그릇에 닿았다.           


“명주라고 합니다.”     

“초학의로 뽑힌 것은 몇 살이었습니까?”     


“10살입니다. 제주목 관아의 관비였다가 의녀로 뽑혀 혜민서 초학의가 되었습니다.”     


호산월은 빙긋 웃으며 반가워했다.          


“제주면, 그슨대 이야기를 아시겠소?”     

“자세히는 모릅니다.”     


호산월은 신이 나서 의녀를 향해 몸을 돌리고, 그슨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두운 밤, 횃불을 든 무장 하나가 길을 가다가 그림자 요괴를 만났지요. 칼로 아무리 베어도 사라지지 않고 커지기만 하다가 그 무장을 집어던져 죽였다는 이야깁니다.”




의녀는 그슨대 이야기가 그저 한심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보다 세상 사는 게 백배는 무섭다고 말하려던 것을 꾹 참고, 약그릇이 놓인 쟁반을 앞으로 밀었다.


“식기 전에 얼른 약부터 드세요.”     

“이런 밤을 말하는 거랍니다. 그믐의 해 질 녘부터 새벽까지요. 달도 뜨지 않을 만큼 어두운 밤. 그래서 두려운 마음은 더 커지고 커져, 앞은 더더욱 안 보이는 밤 말입니다.”          


혜민서 의녀, 명주는 호산월의 말에 빠져들어 눈도 깜박일 수 없었다.           


“역병 환자는 하루가 멀다 밀어닥치고, 굶주리는 아이들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데, 선혜청은 텅텅 비어 죽조차 먹일 수 없지요? 전의감에서는 약재를 보내지 않으니 살릴 수 있는 환자도 죽어 나갈 밖에요.“     


명주는 치마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꽉 쥐며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막았다.           


“아무리 칼을 휘둘러 봐야 이 어둠이 사라지겠습니까? 사라지지 않으니, 불안은 더 커지고, 절망은 거대해져 내 목을 콱 움켜쥔 채 숨도 쉬지 못하게 하지요.”          


울음이 날 것 같아 명주는 얼른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10살에 제주 관비셨으면, 봉산에서 시작한 옥사 때문이겠네요. 아버님께선 어찌 되셨소?”     




“...... 사약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제주도 가는 배에서 바다로 뛰어드셨고, 저는 관비가 되었지요.“     


캑캑거리는 소리와 함께 호산월이 마른기침을 시작했다. 소매 속에 넣어두었던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한 호산월이 명주를 향해 다시 빙긋 웃었다.


“어서 약부터 드세요.”          


한차례 기침을 하고 난 호산월이 손수건을 쥔 채 약그릇을 바라보았다. 까만 그림자보다 까만 어둠보다 더 까만 약물에 촛불의 빛이 일렁댔다. 호산월은 약그릇을 드는 대신 다시 의녀 명주를 바라보았다.          


“아버님이 사약을 드시고 돌아가셨다고 하셨지요? 사약을 만들어 본 적 있으십니까?”     


명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약에 들어가는 독초가 하나 있습니다. 각시투구꽃이라고. 아시지요? 아, 다른 이름으로 아시려나? 초오는 아시지요? 이 꽃은 신기하게도 빛을 받으면 피지 않고, 그늘진 곳에서만 핀답니다.”          


명주는 쟁반의 약그릇을 보며, 숨소리를 멈췄다.     


“초오의 덩이뿌리로 사약을 만들지요. 신기하게도 초오의 독성은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강해지고, 차갑게 식으면 독성이 줄어든답니다.”     




“기침을 다스리시려면 얼른 약을 드셔야 합니다. 심해지면 광희문 밖으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의녀는 버티고 앉아 호산월이 약을 다 마시기를 기다렸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약을 먹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하면서도 다른 방법은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 기침은 역병이 옮은 것도 아니고, 찬비를 맞아서도 아닙니다. ... 어둠 때문이라오. 어두운 밤을 돌아다니는 인요물괴(人妖物怪) 때문이지요. 그들 중 누군가가 의녀님을 그슨대 앞에 세웠구려. 이제 의녀님은 그슨대를 올려다볼지, 내려다볼지 결정해야 합니다.”          


‘다 알고 있구나.’ 의녀 명주는 치마를 꽉 쥐며 호산월의 부드러운 미소를 마주 보아야 했다. 다 알고 있다. 설마 했는데 역시였다.          


“올려다보면, 그 어둠이 의녀님을 집어삼킨다오. 호랑이가 사람을 씹어먹는 것과는 다르지요. 그림자가 그림자를 삼키는 것과 같지요.”     


“하지만, 동생이 … 나주목 관아에 있는 동생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일을 성사시키지 않으면, 군량미를 훔친 죄를 씌워 사지를 찢어 죽인다고 했습니다.”          


의녀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의녀 명주의 꽉 움켜쥐고 바들바들 떠는 주먹에, 호산월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이제 동생마저 죽게 생겼습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소녀에게는 칼도 없어, 그 요괴를 벨 수도 없습니다.“



호산월은 소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쟁반 위의 약그릇을 들어 단숨에 검은 약물을 몸 안으로 털어 넣었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먹은 후 그릇을 내리자, 의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호산월을 바라보았다.     


“그슨대와 만난 무장이 어찌하여 죽은 줄 아시오?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내던지고 어둠 속에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명주 의녀님! 횃불은 버리지 마세요. 마음속에 있는 빛은 잃지 마세요.”     


의녀는 그대로 호산월의 방에서 뛰어나갔다. 고요해진 방에 혼자 남은 호산월이 창밖의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능소화는 여름 바람에 흔들렸고, 흔들릴 때마다 향기를 흩뿌렸다.     


멀리 풀벌레 소리도 들리고, 반딧불이가 반짝이며 날아다녔다. 밤은 깊어질 것이고, 더욱더 어두워질 것이며, 칠흑 같은 시간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새벽 늦은 시간이 되면 서쪽 끝에 손톱보다 눈썹보다 얇은 그믐달이 잠깐 뜰 것이다.           


“그 정도의 빛이면 충분하지.”          


하지만 지금은 달빛조차 없는 밤이다. 먼 산에서 호랑이가 울고, 궁궐에서 호랑이가 울고, 높은 담장 안에서 이빨을 감춘 호랑이들이 누굴 잡아먹을까, 으르렁대고 있다. 수많은 호랑이가 돌아다니는 어두운 밤이었다.


호산월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다가 축 늘어지며 보료 위로 쓰러졌다. 여름의 낯선 바람이 창으로 들어와 촛불을 껐다. 그야말로 어둠 그 자체인 방 안으로 낮은 울음소리가 흘렀다.     



- 으르르르르 ...     


창밖에서 들어온 반딧불이의 푸른빛이 방 안을 날아다닐 때, 벽에 걸린 두루마리 그림 속에서 다시 한번 누군가를 깨우려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 으르르르르 ...      


그래도 일어나지 않자, 설산을 걸어 나오는 하얀 호랑이가 움직이더니 그림 밖으로 발을 뻗었다. 공중으로 거대한 호랑이가 육중한 걸음을 옮겼다. 푸른빛이 도는 검은 줄무늬가 선명했다. 파란 눈에서는 안광이 흘렀다. 하얀 털들이 한 올 한 올 흔들렸다.      


- 으르르르르 ...     


호산월이 눈을 떴다. 쓰러진 채, 방안에 버티고 선 흰 호랑이를 바라보았다. 캑캑거리는 기침과 함께 검은 핏물이 울컥 쏟아졌다. 느리고 가쁜 숨을 헐떡이던 호산월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게 하시네.”     


아직 달이 뜨지 않은 밤이었다. 먼 산에서 호랑이가 울고, 궁궐에서 호랑이가 울고, 높은 담장 안에서 이빨을 감춘 호랑이들이 누굴 잡아먹을까, 으르렁댔다. 수많은 호랑이가 돌아다니는 어두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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