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가 길었다. 키가 큰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생각시는 사랑채 복도를 걷고 있었다. 내년이면 계례를 올리는 지밀의 견습 나인은 품에 든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송화루 어르신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누구도 보지 말고, 어떤 소리도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쯤은 알고 있었다. 처음 궁에 들어갔을 때, 내시들이 횃불을 눈앞에서 흔들며 ‘쥐 부리 지져.’라는 말을 했다. 입조심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송화루 퇴기 호산월의 말은 조금 달랐다.
‘눈을 잘 뜨고 있어야 안 볼 수 있고, 귀를 쫑긋 열고 있어야 듣지 않을 수 있답니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데, 방문이 열렸다. 3칸짜리 사랑방의 끝에, 젊은 사내 한 명이 앉았다. 두 번째 칸에 그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생각시는 문 앞에 서서 절을 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김상궁 마마께서 전하라셨습니다.”
두 번째 칸의 남자가 일어나서, 생각시가 갖고 있는 편지를 첫 번째 칸의 남자에게 올렸다. 첫 번째 칸의 젊은 사내가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전옥서 신 참봉이 아버지라고? 오라비들은 사역원에 있다지? 어느 나라의 말을 배우고 있는가?”
생각시는 숨을 들이켜고는 멈췄다.
‘눈을 잘 뜨고 있어야 안 볼 수 있고, 귀를 쫑긋 열고 있어야 듣지 않을 수 있답니다.’
호산월의 말이 생각시에게 용기를 갖도록 했다. 생각시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 보이는 젊은 남자는 매화 분재 너머에서 웃고 있었다. 매화꽃이 몇 군데 피기는 했지만 고르게 피지 않아 균형이 깨진 분재였다.
“큰 오라버니는 한학을 배우고, 작은 오라버니는 여진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절묘하군. 명나라냐, 후금이냐… 어린 나인께서는 어떤가? 한학이 나은가? 여진학이 나은가?”
생각시는 광통교에서 거울 닦는 마경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매화 앞의 남자를 다시 보았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이 매서웠다. 호산월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소인은... 그저, 설날에 떡국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고, 단오에는 그네를 탈 수 있으면 다행이고, 상원에 뜨는 커다란 만월 아래서... 부모님이 건강하시기를 바라는 소원을 빌뿐입니다.”
“흐흐흠흠흠...”
매화분재 앞의 젊은 남자가 차가운 눈빛을 하고 소리를 내 웃었다.
“그렇군. 그래. 소원이라. 벌써 설이 지나고 대보름이야. 계해년이 밝았어. ...어린 나인께서는 계해년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는가?”
호산월이 했던 말이 그에게서 다시 나오자 신기했다.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호산월이 말하지 않았다면, 대답하지 않았을 테니, 지금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癸) 자는 천간의 마지막 글자로, 북방을 뜻하고, 겨울을 뜻합니다. 해(亥) 자는 돼지라는 의미인데, 계 자가 해 자를 만나면, 큰 바닷물을 뜻합니다.”
매화 앞의 남자가 먹빛 도포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낙서! 알고 있었나? 아니지. 음서로 관직에 오른 자네가 그런 뜻까지 알리 있나.”
“해 자가 십이지신 중 돼지를 뜻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대감.“
“그냥 돼지는 아니지.”
“예? 돼지면 돼지지, 다른 돼지가 있습니까?”
두 번째 칸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돌려 생각시를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해 자의 돼지는 도대체 어떤 돼지기에 그냥 돼지가 아닌 것이냐? 알고 있으면 말해 보거라.”
“... 돼지를 뜻하는 다른 글자와 달리, 해 자는 ... 죽이고 머리를 잘라내 도축한 돼지를 의미합니다.”
“옳지. 과연 김상궁이 지밀로 데려올 만하군.”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균형이 깨진 매화 분재 앞의 남자는 여전히 눈빛이 차가웠다. 그 눈으로 생각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듯했다.
“주상전하께서는 강녕하신가? 귀신이 보인다. 도깨비를 보았다. 아직도 그러시는가?”
열다섯 살의 생각시는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왕은 승려를 지밀로 부르고, 점쟁이도 불러 신점을 보곤 했다. 그야말로 내밀한 이야기였다. 생각시는 다시 매화꽃 너머의 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제야 호랑이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생각시는 종루 앞에서 수레에 실려 가던 시신들을 떠올렸다. 호랑이를 만나 형체도 없이 조각난 시신들이 먼 미래의 자기 모습일 것 같았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같은 신세가 될 것도 같았다. 그제야 생각시는 호산월이 한,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창귀라는 귀신이 있나이다.”
그 말에 매화 앞의 사내가 눈을 반짝였다.
“호랑이에게 잡혀 대신 먹을 것을 찾아다 주는 귀신인데, 잘 생각해 보면 미끼랍니다. 이 창이라는 글자에는 ... 길을 잃고 갈팡질팡한다는 뜻도 있답니다.”
사내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 생각시는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스스로 들으며, 호산월이 해주었던 말을 한 자 한 자 떠올렸다.
“남이 시키는 대로 살면, 남의 도구가 되면, 갈팡질팡한다고 들었습니다. 소인은 심부름이 끝나고 입궁하면, 거울을 닦아야 할 것 같습니다.”
-쾅!!
두 번째 칸의 남자가 서안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생각시가 놀라 움찔하는데, 첫 번째 칸의 남자가 조용히 물었다.
“어린 나인에게 창귀에 대해 말해준 이는 누군가?“
“…………… 저잣거리에서 풍문으로 들은 듯합니다.“
생각시를 내보낸 매화꽃 앞의 남자는, 가위를 들어 너무 길게 자란 매화 가지 하나를 잘랐다.
“저 아이는 너무 똑똑해서 안 되겠어. 김상궁에게 지밀나인 중, 좀 덜 영리한 아이로 다시 보내라고 하게.”
“그냥 김상궁을 계속 쓰시지요?”
“여우는 오래 살면 구미호가 된다지? 진짜 구미호가 있다면, 김상궁 그년이야.”
생각시가 대문을 나서는데, 처음 그 자리에서 호산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산월은 빈손으로 나오는 생각시를 보고는 소리 내지 않고 큰 숨을 내쉬었다.
“갑시다. 궁문까지 바래다 드릴 게요.”
“가는 길에 시루떡을 사 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호산월은 광통교 근처에서 시루떡을 사고, 생닭 세 마리를 샀다. 연등도 하나 사서 생각시를 광통교 아래 개천으로 내려보냈다. 생각시가 개천에 연등 띄우는 것을 보던 호산월이 중얼거렸다.
“창귀야, 어디를 헤매고 있느냐? 얼마를 죽여야 원한이 풀릴까?”
늦은 밤의 달보다 더 싸늘하게 해가 식어갔다. 입에서 흐르는 하얀 입김이 손을 쓸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점점 느려지고, 숨이 천천히 느려졌다. 기어 다니는 벌레 소리와 개천을 헤엄치는 물고기 소리와 어느 나뭇가지에 앉은 새의 날갯짓까지 느껴질 즈음, 땅을 사뿐히 걷는 호랑이의 두툼한 발걸음이 땅을 울렸다.
“기어이 풀어놓았구나.“
호산월은 소원을 빌고 있는 생각시를 내려다보며, 종루 앞에서 수레에 실려가던 조각 난 군사들의 시신을 떠올렸다.
“사람까지 죽여 가며 잡은 호랑이를 놓아주는 이유야, 더럽고 추악한 것이겠지.”
호산월은 생각시를 두고 작은 발소리를 쫓아 걸었다. 군기시로 향한 골목에 들어선 호산월이 걸음을 멈췄다. 채 녹지 않은 눈이 담과 벽에 쌓여있는 골목에 호랑이 한 마리가 조용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물에 얽혀 버둥거린 듯 호랑이의 피부는 여기저기 벗겨졌고, 피가 엉겨 붙어있었다. 눈 위의 머리 부분은 무엇으로 맞았는지 움푹 파이고, 뼈가 튀어나왔다. 제대로 앞을 볼 수 있을까 싶은 몰골의 호랑이는, 며칠을 굶었는지 배가 홀쭉하고 가슴뼈가 보였다.
“산군께서는 예서 이 몰골로 무엇을 하시오? 배를 곯았다고, 인간의 창귀가 되어서야 쓰겠소?”
이를 드러내자, 굵은 송곳니가 보였다. 무엇이든 깊이 박아서 뜯어낼 것 같은 송곳니다. 하지만 호산월은 길을 비켜줄 수 없다.
“산군은 지금 창귀 신세요. 잡아서 가둔 그놈들이 원하는 것은, 아주 많은 사람의 죽음이니까요. 대낮의 호랑이는 공포지요. 그 공포는 불안이 되고, 왕을 향한 분노가 된다오.“
호랑이는 걸음을 멈췄고, 호산월이 한 발 더 앞으로 갔다. 그 앞에 털을 뽑은 생닭 세 마리를 놓았다.
“이 길은 창귀의 길이오. 뒤돌아 가면 산군으로 살고, 산군으로 죽는 겁니다.”
상처 입은 호랑이는 몇 발 다가와 기름먹인 종이 위의 생닭을 먹었다. 뼈까지 씹어가며 다 먹은 호랑이는 눈을 끔뻑이다가 몸을 돌렸다. 광통교로 돌아왔을 때, 생각시는 시루떡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먼저 가신 줄 알았습니다.”
“갑시다. 상궁 마마 드릴 호두 정과도 사야지요. 그래야 사자놀이를 구경하고 늦게 들어가도, 혼나지 않지요.”
두 사람은 거울 닦는 마경장의 작은 점포를 향해 걸었다. 눈 쌓인 인왕산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 위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러자 얼어붙은 인왕산에 주황빛 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