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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렌즈

(20) 저녁의 소묘, 한강

by 예쁨


<저녁의 소묘>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평화도,

오랜 지옥도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히도록


외등은 희고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 되도록


그의 눈을 적신 것은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


-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한강 시집) -


소묘(drawing): 색을 칠하지 않고 선과 명암, 질감으로 형태를 포착하여 그리는 그림 기법





해와 밤의 경계가 숨을 고르는 블루아워(Blue Hour)

하루의 소음이 가라앉고, 아직 어둠이 다 물러나기 전, 하늘이 가장 푸른 온도로 식는 그 짧은 순간.

세상은 잠시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물들고 모든 감정이 제 그림자를 길게 끌고 나온다.

구리암사대교 블루아워 (2025. 11)

한강 시집에는 저녁이라는 시간 때가 자주 등장한다.

저녁의 소묘, 저녁의 소묘 2, 저녁의 소묘 3……그녀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는 ‘저녁의 소묘’라는 시가 무려 5편이나 수록되어 있다.

그중 첫 번째 ‘저녁의 소묘’가 마음을 흔든다.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빛이 모호해져서 눈앞의 존재가 익숙한 개인지, 위험한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황혼의 순간을 뜻한다.

현실과 환상이 맞물리는 그때, 어떤 저녁은 붉은 기운을 흘리며 하루의 상처를 드러낸다.

그녀가 바라본 피투성이 하늘은 삶의 본색을 고스란히 표현한 듯하다.

새벽에 품은 꿈과 기대는 저녁이 되도록 상처로 남아 같은 색으로 반짝이니까.

(아 이번 주 또 로또 꽝이네)


색을 지우면,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선과 그림자, 사물의 결이 또렷해진다.

흑백은 감정을 단순화시키고, 보는 이로 하여금 여백을 느끼게 한다.

저녁의 소묘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같은 풍경이라 할지라도 색을 제거하고 보면, 느끼는 감정의 차이도 다르다.

색에 가려졌던 질감과 대비가 드러나며 저녁의 감각과 공명한다.

그러니까 사진 속 ‘저녁’을 흑백으로 스케치해 보면,

감정의 과잉을 덜어내고 비로소 강과 시간, 그리고 마음속 진심을 동시에 마주할 수 있다.

퇴근길 버스 창가에서 찍은 사진이지만 칼라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하루를 견뎌낸 자만이 갖는 묵직한 그늘이 음영을 따라 남루함을 껴입은 채 강을 가로지른다.

(남루함은 얇기까지 해서, 주섬주섬 입어야만 한다네)


외등은 희고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 되도록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얼굴 위로 평화와 지옥이 동시에 있는가 보다.

그는 왜 외등을 피해 걸었던 것일까?

자신의 초라함이 들켜버릴까 겁이 났던 걸까?

어쩌면 잿빛이 더 익숙한 그에게 연민의 마음이 일어난다.

(퇴근하는 직장인들 안쓰럽…….)


‘저녁의 소묘’는 세상의 칼라를 모두 흑백 렌즈로 바꿔 바라보면서 끝내 검은 눈물까지 흘러내린다.

저녁은 그런 시간이다. 칼라에서 흑백으로 바뀌는….

자신만의 저녁 소묘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에 렌즈를 들이대고, 혹은 휴대폰 사진첩 안에 있는 한 장면을 골라보자.

색을 지우면 무엇이 남는지,

결국 그 흑백 세상이 우리 자신과 세상의 본질이고 형상일 테니까.




내가 바로 가을이로소이다
단풍잎 (2025. 11)

빨강, 주황, 노랑 같은 따뜻한 색감이 어우러진, 그러데이션이 풍부한 단풍잎을 주웠다.

단풍잎은 마치 ‘내가 바로 가을이로소이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 고운 빛깔의 단풍잎에 흑백 렌즈를 끼고 본다면…?

색 정보가 사라지면서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돋보이게 된다.

단풍의 화려함은 없어졌지만 명암이 강조되고 오히려 잎맥은 또렷하게 살아나는 것이다.

가을의 색감은 걷어내고, 단풍잎이라는 존재를 온전히 느껴본다.

(그래도 단풍잎은 칼라가 예쁘잖아ㅠ)


신호등 의자
의자 셋 (2020. 10)

햇살 가득한 오후, 생동감 있는 색감을 가진 의자에 흑백 렌즈를 끼고 본다면?

그들은 마치 오래된 흑백 영화 속 장면처럼 긴 이야기를 숨긴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존재가 된다.

회색의 결로 나란히 앉아 있을 때,

누군가 하루를 털어놓고 갈 것만 같은 자리, 어쩌면 어깨를 맞댄 채 저희들끼리 의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자리가 된다.


같은 의자, 같은 자리지만 색을 지우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세계로 넘어간다.

흑백 세상은 색을 잃었다기보다 색 너머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있다.


빨간 화분
국립현대미술관 / 장 피에르 레이노의 <빨간 화분>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입구에 떡 하고 버티고 있는 저 작품은 장 피에르 레이노의 <빨간 화분>이다.

‘붉음’이라는 강렬한 색과 압도적인 크기로 시선을 사로잡고, 마치 스스로 발열하는 조형물처럼 주변의 공기마저 달아오르게 하지만,

흑백 렌즈로 바라보는 순간, 작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흑백 속의 화분에서는 더 이상 붉은 욕망은 찾아볼 수 없고 ‘그릇’이라는 순전한 본질만 남는다.


진짜 소묘
보타니컬아트 소묘 (산더소니아, 앵초, 가지와 양파)

동네 문화센터에서 3개월정도 ‘보타니컬아트’를 배운 적이 있다.

비록 소묘를 마치고 색채 수업을 신청하지 못했지만 그때 그림에 대한 흥미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소묘는 음영이 중요하다.

그림의 생동감을 오로지 빛과 그림자로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흑백의 세계는 화려함보다 더 높은 집중력을 요구한다.

(양파를 그리고 나서 한동안 양파를 멀리했다;)


저녁은 하루 중 색이 가장 빠르게 사라지는 시간이다.

붉은 태양이 스윽 빠져나가면, 남은 풍경은 마치 연필심으로 그린 소묘처럼 빛과 그림자의 골격만 남는다.

소묘가 색을 대신해 명암과 질감만으로 형상을 일으켜 세우듯 저녁 또한 하루의 마지막 장면을 가장 단단한 윤곽으로 남긴다.


색을 덜어내도 남는 것,

그 본질을 바라보려는 시선,

실제 소묘가 화려한 색채보다 더 깊은 집중을 요구하듯 저녁 또한 우리에게 묻는다.



색이 사라진 뒤에
너는 무엇을 보고 있니?




by. 예쁨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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