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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겨울의 봄 03화

03. 소미와 지현

by 백수광부

소미는 서른 살이다.

어린 시절엔 가진 게 없었고, 이십 대엔 자신까지 없었고, 현재는 재미가 없지만 버틸 만은 했다. 사람들 앞에서 화사한 웃음을 연기할 수 있을 만큼 사회화되었다. 진정한 친구가 없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지만 기대를 안 하니 연연하지도 않았다. 가끔씩 찾아오는 쓸쓸함은 배부름이라 치환하면 제법 마음도 편했다.


작가를 꿈꾼 적도 있었지만 소미에겐 그건 꿈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이내 형체 없이 뿌옇게 사라지는 꿈.


꿈은 원래 이루기 힘든 거니까.

현실은 멈출 수 없으니까.
쓰다 멈출 수 있는 글이 아니니까.
쉬어가는 여유 따위는 없으니까.

내 인생에서 꿈은
안 보여야 했다.
치워놓고 살아야 했다.


숨죽여 '글'을 쓰는 작가보다 춤추는 '글자'의 박자감을 쫓는 게 상쾌했다. 깨끗한 종이에 정갈히 배치된 덩어리감을 보면 마음이 훈훈해졌다. 에디터로 자신의 손길을 거친 책이 화제가 되면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작가에 대한 독자의 선망에 자신의 몫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도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 미지의 꿈을 찾기 위한 충동에 불쑥 집을 나서는 일도 잦았다.


토요일 아침 무작정 아무 버스에 올라 종점에 내렸다. 추억은 언제나 외로운 길의 이정표가 되었다. 어느덧 또 그 바다에 와버렸다. 애써 다른 방향으로 걷다 보니 소리숲 도서관이었다.

사서 은경과 식사를 하면서 소미는 금세 그녀를 파악했다.


‘경청하지만 마음을 뺏기지 않아. 포용하는 듯하지만 폐쇄적이야. 얻으려 욕심내지 않고 잃지 않으려 단단히 여미고 있어.’


상대의 속마음을 뜯어보려는, 작가병인지 편집자병인지 모를 안 좋은 버릇이 일어남을 자각하곤 고개를 저었다. 편안한 대화상대를 찾아 나선 길 끝에 공허함이 밀려왔다.

흰 순두부가 빈속을 꽉 채워줬음에도 말이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도 몸의 수분은 날아가기만 했다. 채워지지 않고 자꾸 말라만 갔다.


소미는 은경과 식사를 마친 후 무작정 겨울 바다를 걸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에 본능적으로 가방에 손을 넣었다. 더듬더듬거렸다. 털장갑을 손안 가득 움켜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꺼내어 양손에 꼈다.

빨간 털장갑은 온 세상의 차갑고 건조함으로부터 소미 자신을 지켜주는 기분이었다. 손이 따뜻해지니 후각도 열리고 청각도 열렸다. 바다냄새가 나고 사람 소리가 들렸다. 해수욕장에서 짠내와 단내가 섞인 듯한 향긋한 냄새가 솔솔 피어나는 듯했다.


소미는 6살 어린아이가 되었다. 속이 아주 노란 고구마와 아버지의 모습이 스쳤다. 어린 시절, ‘앙’하고 군고구마 한입 깨물었을 때 뜨겁고 달콤했던 그 행복감이 차올랐다.


소미 앞에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아저씨가 고구마를 굽고 계셨다.


“아저씨, 군고구마 2개 주세요.”


아무 말 없이 아저씨는 종이봉투에 군고구마를 담아서 건넸다. 소미도 별말 없이 돈을 건넸다. 소미는 이내 군고구마를 담은 종이봉투의 온기로 온몸이 따뜻해졌다. 아저씨와 한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행복을 머금고 돌아서 고구마 껍질을 벗기며 걷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 소미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악!”


소미는 비명을 질렀다.


“내놔. 이거 내 거야!”


어떤 여자가 소리쳤다.


잠시 후, 남자 어른의 짧고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손 놔!”


진성은 재가 묻은 장갑을 낀 채 지현의 팔을 잡고 놓으라고 말했다. 지현은 더 거칠게 소미의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었다. 빨간 장갑을 억지로 벗기려 용을 쓰기도 했다. 소미는 결국 장갑 한 짝을 지현에게 뺏겼다.

휘청이다 군고구마도 놓치고 말았다.


껍질이 벗겨진 채, 베어 문 흔적 없는, 김이 솔솔 나는 먹음직스러운 군고구마가 흙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니 진성은 속이 쓰렸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지현을 소미에게서 떼어 냈다. 빨간 장갑도 빼앗아 돌려주었다.


“죄송합니다.”


군고구마 아저씨가 허리 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보며 소미가 말했다.


“아, 아파. 근데 아저씨가 뭐가 죄송해요?”

“제 딸입니다.”


“아···.”

“자기 물건이라고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다짜고짜 머리채부터 잡고 이러면 안 되죠.”

“정말 죄송합니다.”


진성의 사과에도 지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미를 째려보았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욕을 해댔다.


“도둑년.”


“뭐라고요!”


소미가 참지 못하자 진성은 지현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러곤 돌아서서 지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만해. 제발.”


정적이 흘렀다. 지현도 소미도 더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진성이 소미를 보며 말했다.


“군고구마 값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게.”


소미가 말을 잇기 전에 진성은 주머니에서 소미에게 받은 돈을 다시 건넸다. 이내 지현을 데리고 군고구마 손수레 쪽으로 걸어갔다. 지현은 아까와는 다르게 순한 양처럼 진성의 손수레를 밀며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소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진성의 손수레는 허름한 단독주택 앞에 멈췄다.


“끼익!”


닳아 소리가 더 요란한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집안 거실에 불이 켜졌다. 지현은 마당에 있는 평상으로 달려가 누웠고 진성은 손수레를 정리했다.


집안에서 혜선이 한쪽 다리를 절면서 그들에게 다가왔다.


“지현이가 당신 일 도와주러 갔나 보네요.”

“···.”


진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지친 진성의 눈치를 잠시 살피던 혜선은 누워있는 지현을 일으켰다.


바닥이 차. 들어가 밥 먹자.”


혜선은 지현을 챙겨 들어가면서 남편에게도 말을 건넸다.


“밥 다 차려놨으니 얼른 들어와요.”

“담배 한 대만 피고.”


“몸에도 안 좋은걸.”

“흠.”


진성은 마당의 수돗가로 가서 손에 비누칠을 팍팍 해댔다. 시커먼 재는 장갑을 껴도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겨울에도 찬물로 손과 얼굴을 씻곤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곤 밥상 앞에 앉았다. 그가 앉을 때를 맞춰 혜선이 뜨거운 국 한 그릇을 그의 자리에 놓았다.


“닭곰탕이 아주 진해요. 후추랑 파 넣어서 들어요.”

“토종닭 같은데, 어디서 났소?”


“주말에 은경이가 사다 주고 갔어요.”

“흠.”


진성은 국물 한 수저를 떴다.


“그 아가씨한테 빨리 정신 차리라고 해.”

“무슨 말이에요?”


“그놈은 이미 글렀어.”

“아들한테 글렀다니.”


“당신은 그놈이 제정신 박힌 걸로 보여?”

“저도 사는 게 힘에 부치니 그래요.”


“사는 게 다 그렇지. 저만 그래?”

“암말 안 할 테니 밥이나 들어요.”


혜선은 남편과 싸우기 싫어 자리를 피했다.

‘젊을 때 돈 좀 많이 벌지 그랬소? 욕심도 야망도 가지면서. 그랬으면 자식이 힘들 때 척척 도와주고 했을 텐데.’


혜선은 누구보다 남편이 성실히 살아온 걸 알지만 못난 마음은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혜선은 어쩌면 그 말을 자신한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몸이 불편해 남편이나 자식에게 도움은커녕 짐만 되는 것 같아 원망스러웠다. 거기에 친정 조카까지 책임져야 하니 남편에게 자꾸 죄스런 마음뿐이었다.


무던히 마당에 쌓여있는 빈 술병들을 정리했다. 천 원이라도 벌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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