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경이 이불 밖으로 나오자 태현이 움찔했다.
“깨워서 미안. 좀 더 자.”
은경은 이불을 태현의 머리끝까지 덮어주었다.
“서두르지 말자.”
그런 희망의 말을 태현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꿈도 야망도 없는 비겁한 말 같았다.
“또 그 소리.”
은경은 태현을 다독였지만 오히려 그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은경이 그럴수록 태현의 야심 찬 계획들은 허공의 발차기가 되었다.
태현은 머리채를 잡힌 채 허둥대며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심통이 났고 원인을 밖으로 돌렸다.
부모 탓,
세상 탓,
그녀 탓.
“서두르지 않으면 계속 밑바닥 거지처럼 살 거야?”
“바닥이어도 난 너만 있으면 돼.”
“박은경! 정신 차려. 난 이제 바닥도 없어.”
“···.”
태현은 은경의 태양이다.
태양 빛이 소멸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은경에게도 고통이었다. 은경은 옷을 챙겨 방문을 열고 나갔다.
태현도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밟고 일어설 바닥이라도 있으면 좋겠네."
태현도 집 밖 편의점으로 갔다. 바지 뒷주머니에 반으로 접힌 채 들어있던 지폐를 꺼냈다.
'어깨 나갈 정도로 일해도 겨우 이 정도.'
어젯밤 물류알바로 번 돈 7만 원을 ATM에 입금했다. 뒤돌아 나오면서 담배 한 갑과 불닭볶음면을 샀다. 뜨거운 물을 부어 볶음면을 조리한 후 편의점 밖 파라솔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바닥에는 가래침 묻은 담배꽁초가 한가득 나뒹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전날 비에 젖은 박스를 주워 모으는 경식이 할아버지가 계셨다. 경식이 아버지는 부인이 집을 나가자 경식이를 살해하고 본인은 자살했다. 할아버지는 아들과 손주를 함께 잃은 슬픔을 십 년째 수레를 끌며 견뎌내고 있었다.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 몸을 혹사시켜야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폐지를 집채만큼 쌓아 올렸다.
거대한 폐지에 묻혀버린 시커멓게 그을린 마른 장작 같은 할아버지를 볼 때면 태현은 더욱 답답해졌다. 그는 뭔가 결심한 듯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마지막 딱 한 번이다.'
체크카드에 남은 돈을 도박사이트 캐시로 전환했다. 여느 중독자들처럼 그때는 운이 없었을 뿐이라 되뇌었다. 그래서 또 운을 좇기로 했다.
노력이 아닌 운이 지배하는 세계.
태현은 적어도 그곳이 모든 이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가볍게 시작했다.
단돈 6만 원.
그의 얼굴에 이내 화색이 돌았다. 순식간에 10배로 자산을 증식한 재테크계의 마이더스가 되었다.
“그렇지! 이게 인생이지!”
흥분한 태현은 나무젓가락 한 쌍을 두 개로 가르며 연신 실실 웃었다.
매운 불닭볶음면을 휘휘 저어 빈속에 밀어 넣었다. 코와 입으로 퍼지는 캅사이신의 위력을 능가하는 도파민이 몸 안에서 솟구쳤다. 하지만, 60만 원은 명품 패딩값도 안 되는 돈이었다.
“오늘 뭔가 되는 날이다. 한 번 더 가자!”
60만 원으로 다시 베팅한 후 초조히 결과를 기다렸다. 몇 분 안에 6만 원에서 600만 원을 버는 행운을 기대하며 휴대폰 화면을 주시했다. 수많은 달러들이 화면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손을 뻗어 달러를 주워 담으려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돈도 희망도.
그의 표정은 일순간에 일그러졌다.
태현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배에 불을 붙여 깊이 빨아 당겼다. 행운은 타버렸고 독성은 쌓여갔다. 태현은 먹다 남은 볶음면을 테이블 위에 남겨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박 결과에 이제 욕도 나오지 않았다. 꼬인 인생에 대한 불만을 쏟아낼 만큼 삶에 애정도 없었다.
담배만이 그의 숨통을 뚫어줄 뿐.
은경은 아침바다가 좋았다. 탁 트인 방파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엄마 생각이 났다. 조개껍질 주워서 가져가면 엄마는 웃어주었다. 바닷바람을 마시며 한참을 걷다 보면 서서히 소나무 피톤치드향이 스며들었다.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은경은 산책길이자 출근길인 이 길을 참 좋아했다.
은경은 아침 8시 30분에 소리숲 도서관에 도착했다. 맑은 물소리, 새소리, 뒷산에서 들리는 샤샤삭 거리는 숲 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는 도서관 안으로 들어섰다. 냉기가 느껴졌다. 온풍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은경은 책상에 가방을 내려 두고 패딩을 벗어 자리 뒤편 옷걸이에 걸었다. 가습기와 커피포트에 물을 채웠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정해진 순서에 맞게 움직였다. 공간의 모든 것을 깨울 시간이었다.
“얘들아, 언니 왔어. 다들 일어나.”
혼잣말하며 컴퓨터, 가습기, 커피포트의 전원 버튼을 차례대로 눌렀다.
윙~
위~잉. 푸~
굴룩굴룩굴룩.
기계들의 기지개 소리가 은경을 미소 짓게 했다.
“오늘도 기분 좋게 움직이자. 알겠지?”
머그잔에 커피 스틱 하나를 쏟아붓고 끓어오른 커피포트 물을 부었다.
“쪼르르.”
그 소리가 좋았다. 얼굴에 와닿는 뜨거운 김도 좋았다.
태현이 떠올랐다.
새벽에 일을 마치고 들어와 자는 걸 알았지만 일부러 모른 체했다. 술담배 찌든 내가 코끝을 뚫고 들어왔지만, 묵묵히 삼켜냈다. 그조차 자기 삶의 일부라 받아들였다.
공간의 냉기에 빨리 식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따뜻한 머그잔을 은경이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딱 그만큼이 그녀가 원하는 삶의 온도였다. 은경은 컵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현아, 난 이 정도 온기면 충분해.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은경이, 기관에서 줄곧 자라온 그녀가 태현에게 원한 건 딱 그 정도였다.
온전한 내 가족.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
뽀송한 이불속에서 낮잠을 잘 수 있는 편안함.
그래서였을까?
은경은 성취보다 안락을,
도전보다 안주를 택했다.
은경은 스키점프 유망주 태현이 부상을 당했을 때 오히려 안도했다. 그가 국가대표 선발전을 포기해야 해서 좌절하고 미친 듯 방황할 때 오히려 안심했다.
윙 컷을 당한 새.
발버둥 쳐도 결국은 바닥에 내려앉는 새.
그때 은경은 다짐했다.
그의 둥지가 되겠다고.
날개 잃은 새와 둥지.
둘의 관계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