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경은 듣고 있던 음악을 급하게 끄곤 옆에 있던 책을 만지작거렸다.
“저, 사서 선생님.”
한 여자가 은경 앞에 서 있었다.
C컬 펌의 단발머리.
화이트 숏패딩에 경쾌한 옷차림.
러블리한 노트북 가방과 텀블러 케이스.
“네. 말씀하세요.”
은경은 얼굴에 미소를 살짝 머금고 대답했다.
“혹시 여기 와이파이 되나요?”
“네, 됩니다.”
은경은 그녀를 유심히 보았다. 도시와 시골 경계에 있는 소리숲 도서관은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은경이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는데 그녀는 초면이었다. 생기 있는 그녀의 모습도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해 드는 창가 자리에 짐을 풀었다. 노트북, 텀블러, 수첩, 필기구 등을 꺼내놓곤 도서관 내부를 돌아다녔다. 은경은 그녀의 신발 소리에 자꾸만 귀를 쫑긋하게 되었다. 때론 천천히, 때론 급하게 움직이는 발걸음이었다. 책을 한가득 끌어안고 와서 자신의 자리에 쌓아두고는 한참을 뒤적거리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듯했다.
다다다다. 툭툭. 툭. 탁. 탁. 클릭. 클릭.
바쁘게 내달리는 노트북 키보드 치는 소리는 조용한 도서관에 울려 퍼졌다.
은경은 커피포트 전원을 눌렀다. 식어 버린 커피에 뜨거운 물을 다시 채웠다. 각설탕 하나를 빠트려놓곤 녹는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숨에 녹아내려 잡을 수 없는 설탕이 자신이 바라는 달콤한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아내리는 허무함을 놓치지 않으려 달달한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읽던 소설책을 덮고 닳고 닳은 면장갑을 꼈다. 익숙한 그 보드라움은 은경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서가를 돌면서 책정리를 시작했다. 스르륵 손끝에 책표지가 닿으면 애착인형을 만진 듯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고 있으니 빨랫줄이 기억났다. 거기 널려있던 수건에서 나던 섬유유연제향이 떠올랐다. 엄마가 늘 빨래 헹굼물에 넣던 마지막 한 방울. 참 포근했던 라벤더 향.
'그때 태현이한테도 그 향이 났었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널 좋아했던 게.'
그녀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은경은 우연히 그녀의 노트북을 보게 되었다. 작업창이 7개나 열려있었다. 메신저 창들은 돌아가며 깜빡였다.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그녀를 찾는 듯했다.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시간을 사는 것 같았다. 은경은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히 본인 자리로 돌아갔다. 뭔지 모를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녀가 도서관을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녀의 키보드 소리는 멈췄고 노트북은 접혀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도서관에 다시 평온함이 스며들려는 찰나, 그녀가 은경에게 다가갔다.
“저랑 식사하실래요?”
“식사요? 아···.”
은경은 늘 혼자 식사했지만 그 시간을 좋아했다. 시계를 보며 12시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차마, 그녀의 점심 제안도 뿌리치지는 못했다.
“네. 함께 식사해요.”
어색했지만 은경은 용기를 내었고 제법 세련된 행동이었다고 생각했다.
“어떤 메뉴 좋아하세요?”
“사서 선생님 추천 맛집이면 다 괜찮아요.”
은경은 근처 두부 요리 전문점으로 향했다. 자극적이지 않고 맹숭한 고소함이 일품인 집이기에 초면에 누군가와 식사하기는 좋았다. 가게 안에 들어가 순두부찌개 2개와 방금 나온 생두부를 시켜놓곤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서로 얼굴이 마주칠 때면 은경은 미소를 머금기도 했지만 먼저 말을 걸진 않았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여기 너무 좋네요. 한적하지만 외롭지 않은 곳이랄까요?”
“그런가요? 표현이 멋있네요.”
“저는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이소미입니다.”
“아, 그러셨구나. 저는 박은경입니다.”
소미는 간단한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은경에게 출판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냈다. 책 이야기라 대화가 자연스러울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은경의 반응은 밋밋했다. 호기심도 리액션도 없었다. 그럴수록 소미는 자신의 바쁜 일상과 화려한 스타작가의 뒷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은경은 소미의 팔딱거림에 미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괜히 애꿎은 순두부만 휘적거리고 있었다.
물컹물컹 건드리면 뭉개지는 순두부.
그것도 시골 촌두부.
은경은 자꾸 소미 앞에서 움츠러들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도 함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소미에게 바쁘다는 핑계를 대곤 도망치듯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풍랑에 출렁였던 도서관이 평온을 되찾은 것 같았다. 은경은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문학책이 꽂힌 서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책을 찾아갔다. 낡은 표지를 넘겨 그 페이지를 폈다. 그 문구는 늘 따뜻했다.
태현이 5년 전에 선물해 준 만년필로 필사노트에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썼다.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그 시간 때문이야.
- 「어린 왕자」 부분, 생텍쥐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