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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겨울의 봄 04화

04. 겨울과 가희

by 백수광부

지나가는 차에 밟힌 떨어진 군고구마를 보고 있자니 소미는 속이 상했다. 쥐어뜯긴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 셀카모드로 얼굴을 대강 정리하고 습관적으로 SNS를 켰다. 갑자기 발생한 이 상황을 기록했다. 빨간 장갑 낀 손과 짓밟힌 군고구마, 재 묻은 지폐 사진과 불편한 심경을 짧게 남겼다.

어머 웬일! 세상엔 이상한 사람이 참 많아요.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맞장구가 제법 위로가 되었다. 창을 닫으려는 순간 SNS 메시지가 날아왔다.


“너 맞지?”


소미는 의미심장한 그 메시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누구시죠?”


잠시 기다렸다.


“개명했니? 아님 필명인가?”


소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구석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주문할 동안 메시지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누군지 알 것 같았다. 10분 정적을 깨고 상대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 가희.”


소미의 예상은 적중했다.


“한국에 돌아온 거야?”


이번엔 소미가 물었다.


답은 하지 않고 가희는 또 질문을 했다.


“아직도 가지고 있었던 거야?”

“뭘?


“그 벙어리장갑.”

“···.”


“그리고 하필 소미?

“···.”


“겨울아.”


소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침 진동벨이 울렸다.


“나 지금 좀 바빠. 다음에 얘기해.”


소미는 메시지를 보내고 대화창을 닫아버렸다. 커피가 가득 담긴 컵이 덜덜 떨렸다. 좌우로 쏟아져 쟁반에 제법 흘렀다. 소미는 겨우 뜨거운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산산이 갈려버린 원두가 뜨거운 스팀을 견뎌야 커피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그때의 기억은 소미를 심하게 흔들었고, 심하게 흔들리고 나서야 마주할 수 있었다. 그건 쓰지만 결국은 마시게 되는 커피처럼 강했다.




9년 전 일이다.

문예창작과 2학년 겨울과 가희는 동기였다. 좋아하는 소설책도 비슷했다.


“겨울아, 이번 소설 공모전 당선작들 봤어?”

“아직.”


가희는 겨울에게 책 한 권을 건넸다. 청량한 푸른색 표지였다.


“엄마가 추천해 준 책인데, 너무 좋아.”

“그래?”


겨울은 가희에게 책을 건네받아 표지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서주원?’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다. 겨울은 그냥 작가의 성이 ‘서 씨’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설렜다. 이유는 딱히 없지만 뭔가 신비로운 느낌에서였다. 책장을 천천히 넘겨 읽어 내려갔다.

강의실로 교수님이 들어오셨지만, 멈출 수 없었다. 키 큰 가희 뒤에 숨어서 계속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강의 종료 5분 전 담당 교수가 말했다.


“2학기 과제는 작가에 대한 자료조사다. 직접 인터뷰해오면 학점 A이상 준다. 기한은 넉넉하게 줄 테니 계획 잘 세워보도록. 오늘 수업 끝.”


교수가 강의실을 나가자 가희가 뒤로 돌아앉았다. 소설 속에 푹 빠져있던 겨울도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겨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가희는 겨울의 두 볼에 양손을 갖다 댔다. 길고 가는 손가락 곳곳에 껴져있던 실반지의 감촉이 겨울에게 전해졌다.


“우리 겨울이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졌지?”

“그게... 소설 내용이 너무 좋아서.”


가희는 감정에 취해 휘청이는 겨울을 토닥이다가 갑자기 신이 난 듯 겨울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겨울아! 겨울아! 우리 이 작가님 찾아가자.”


겨울은 어리둥절했지만 가희의 말이 현실이 될 것 같아 설렜다. 가희가 마음먹은 일은 대부분 이뤄진다는 걸 겨울은 잘 알고 있었다.

서주원 작가와의 연락은 쉽지 않았다. 이메일은 출판사 메일이었고 출판사에 물어도 알려주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가희는 결국 그 찬스를 쓰기로 했다. 지금이 쓸 기회였다.


“안 여사님, 어찌 안 될까요?”


옆에서 겨울은 가희가 엄마와 하는 통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둘의 전화가 끝나고 10분이 흐른 후 가희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날아왔다. 가희는 환호했다.


“공모전 참여할 때 써냈던 주소래. 집은 아닌 것 같고 작업실 같아.”


전화벨이 울렸다. 가희는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안 작가님, 사랑합니다!”


가희의 말에 그녀의 엄마는 그녀에게 당부했다.


“이런 거 알려주면 안 되는 건 알지?”

“당연하죠.”


유명 작가이자 공모전 심사위원인 엄마 말에 가희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주말 아침.

겨울과 가희는 주소 하나 달랑 쥐고 서주원 작가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렇게 불쑥 찾아가도 되나?”

“분명 사전에 물어보면 거절할 거야. 그냥 부딪혀 보자.”


“근데 서 작가님 여자겠지?”

“문체가 섬세하고 감성적인 걸로 봐서 여성작가 같은데?"


"아무래도 그치?"

"그 점이 참 많이 아쉽네."


"훗."


겨울은 가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희의 자동차로 1시간 정도를 달린 후 도착한 곳은 어느 작은 바다마을이었다. 거기에는 펜션과 카페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가희야, 여기 꼭 그 소설 속 집 풍경같지 않아?"

“그 침몰하는 집?”


“진짜 여기 맞는 걸까?”


둘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매점 안으로 들어갔다. 가희는 알바생에게 물었다.


“혹시 서주원 작가님을 아시나요?”


알바생은 둘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번엔 겨울이 나섰다.


“여기 와서 글 쓰는 분을 본 적 있으세요?”


이번에도 그는 둘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겨울은 가방에서 서주원 작가 책을 꺼내 들었다.


“혹시 이 책 작가님 모르시나요?”

“풉.”


그는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차마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숨기지는 못했다.


"혹시 아세요?"

“잘은 모릅니다.”


“모호한 답변이네요.”


셋은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았고 알바생이 먼저 말을 걸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카페라테 2잔 주세요.”


겨울과 가희는 할 말을 머금고 바다 풍경이 보이는 창가로 가서 앉았다. 나란히 앉아 아무 말 없이 바다를 응시했다. 그러는 사이 알바생은 그녀들 앞에 커피 2잔을 가져다 두었다. 둘은 거품 위에 포근히 자리 잡은 하트를 바라보며 웃었다.


“너무 사랑스럽잖아.”


가희가 먼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며 겨울을 쳐다보았다. 놀란 그 눈을 보곤 겨울도 한 모금 마셨다. 둘은 서로를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끝내준다. 너무 맛있어.”


둘은 동시에 알바생을 쳐다보았다. 뒤돌아 커피 찌꺼기를 정리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가희가 소리 죽여 겨울에게 말했다.


“저 알바생 제법 분위기 있지 않아?”


겨울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겨울은 무언가 생각난 듯 뒤돌아 알바생을 보았다. 그곳에 그것이 살짝 삐져나와있는 걸 보았다.


빨간색 그것.

겨울은 알바생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서주원 작가님.”

겨울의 말에 알바생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겨울을 바라보았다. 풍미 깊은 무표정의 아메리카노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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