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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겨울의 봄 14화

14. 소설의 절정

by 백수광부

밤 9시.


“오늘 영업 끝! 작가님들, 뒷이야기 주세요.”


주원이 공손하게 두 손을 내밀었다. 겨울과 가희는 쭈뼛거리며 원고를 건넸고 주원은 그것을 품에 안았다.


“시간이 제법 늦었는데 집에 가야 하지 않아?”


주원이 걱정스레 물었다.


“여기 빈방 많지?”


가희가 주원에게 물었다.


"여기서 자고 가게?"


겨울이 물었다.


"나 집에 오늘 너희 집에서 자고 갈 수도 있다고 말해놨어."


가희의 말에 겨울은 헛웃음이 나왔지만 웃어넘겼다. 주원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방이야 제법 많지. 크리스마슨데 예약이 없어.”

"불행 중 다행이네. 방값은 내가 낼게. 겨울아, 오늘 우리 여기서 자고 가자."

"으응?"


"밤새 파티하자."

"글쎄."


"자고 가는 거다."


가희는 겨울과 주원을 몰아 펜션 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매점 입구 쪽 방문을 열었다. 주원은 직접 만든 샴페인과 직접 만든 쿠키를 꺼내 상차림을 했다. 겨울도 펜션 주방에 있는 유리잔과 젓가락, 티슈 등을 꺼내어 그를 도왔다. 가희는 한쪽 구석에 놓여있던 가렌더 조명을 꺼내 여기저기 걸치곤 전원을 켰다.

“우와~ 제법 파티 분위기 나네.”


겨울은 따뜻한 별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조명을 보며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여기 모여 봐! 우리 짠 하자.”


가희의 휴대폰에서는 캐럴이 흘러나왔고 셋은 샴페인을 마시며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난 너희가 쓴 소설 좀 읽고 올게.”

주원이 다른 방으로 사라졌다.


“보일러 미리 틀어놨나 봐.”

“그러게. 벌써 노곤해진다.”


겨울은 주원의 세심한 배려에 그가 점점 좋아졌다. 흐뭇한 미소를 감추기 힘들었다.


샴페인을 다 마신 후에 가희는 아쉬웠는지 구석에 있는 소주를 꺼내왔다. 둘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시험, 오후에는 소설을 쓰느라 제법 피곤해진 둘은 게슴츠레한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겨울이 가희에게 물었다.


“가희야, 해리는 어떤 사람이야?”

“해리는 말이야. 사랑을 잃은 후, 그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괴로운 여자.”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소미는?”


“소미는 아주 사랑스러운 여자야.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여자.”

“오, 러블리 소미!”


“어릴 때부터 난 여자를 그렇게 묘사했던 것 같아. 사랑스럽게.”

“그럼 준우는?”


“훗. 준우는 뭐랄까?”


겨울이 배시시 웃으며 얼굴이 발그레해지자 가희가 그녀를 놀렸다.


“뭐야? 너 준우랑 사귀니?”

“아이, 왜 그래?”


겨울이 목이 타는지 술을 한잔 쭉 들이켰다. 괜히 방에 있는 주원이 신경 쓰였다.


“근데 가희야, 소설을 쓰다 보면 어느덧 현실이 소설이 되는 느낌이야. 캐릭터 속에 빠져들어.”

“나도 그래. 지금, 이 순간 해리가 된 것 같고 그래.”


“나도. 꼭 준우랑 한 공간에 있는 것 같고 그래.”

“지금부터 우리 그 캐릭터처럼 잠깐 살아볼까? 배우처럼.”


“배우처럼?”


가희는 먼저 목소리를 가다듬고 연기를 시작했다.


“준우야. 보고 싶다.”


가희는 해리처럼 슬픈 목소리로 준우를 부르며 술을 연거푸 마셔댔다. 그 소리에 주원이 방에서 나왔다.


“혹시 불렀어?”

“아니. 우리 지금 연기 중. 히히.”

“소설 말이야.”


겨울과 가희는 기분 좋게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원을 바라보았다.


“둘 다 너무 잘 썼는데?”

“정말?”


서 작가의 칭찬에 작가 지망생의 기분은 더욱 들떴다. 수줍게 발그레해진 겨울이 옆자리에 앉은 주원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셋은 살짝 컵을 부딪치곤 한 잔 쭉 들이켰다.


“그런데 말이야.”


주원이 뜸을 들이며 말을 이어갔다.


“아쉽지만, 지금부터 릴레이는 한 명과 해야 할 것 같아.”

“음.”


“결정해서 내일 아침에 문자 할게.”

“아우, 잔인해.”


가희가 푸념했다.


“미안. 근데 나도 한 사람에게만 몰입하고 싶어서.”

“누구?”


“준우.”

“그러니까 어떤 준우?”


겨울과 가희는 어떤 준우가 주원에게 선택받았는지 아주 궁금했다.


“아직은 미정. 이 밤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오~ 떨리는 걸?”


“캐릭터가 소멸하기 전에 잠시나마 그들로 살아보고 싶어. 두 명의 준우로 말이야. 아니, 세 명의 준우인가?”

“뭔가 우리 제법 멋있는 것 같아.”


주원과 가희가 대화하는 중 겨울도 소미처럼 순수하고 밝은 기운을 한껏 뿜으며 말했다.

“어떤 이의 삶에 주목하고 그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것. 소설의 매력인 것 같아.

동이 틀 때쯤 소미가 사라진다고 해도 난 오늘의 소미를 기억하고 싶어.”


겨울의 말에 가희도 지지 않고 말했다.


“나도 해리가 그냥 사라지게 두진 않을 거야.”


둘의 캐릭터를 향한 애정은 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겨울이 주원에게 다가갔다.


“준우야, 잠깐 밖에 바람 쐬러 갈까?”


겨울의 적극적인 모습에 가희와 주원은 잠시 당황했지만, 무언의 게임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셋은 직감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셋 다 자신만만했다. 소설과 현실 사이의 선, 감정과 이성 사이의 선은 지킬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겨울은 주원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등대 불빛이 살짝 비치는 곳으로 갔다. 거기엔 널찍한 평상이 있었다. 겨울은 그곳에 앉았다가 이내 누웠다.


“너도 누워봐. 누워서 보는 달빛이 참 예뻐.”


겨울은 어릴 적 누워서 밤하늘을 바라보던 추억이 떠올랐다. 아무 걱정 없이 밝고 쾌활했던 자신이 그리웠다.


소녀 겨울처럼.

사랑스러운 소미처럼.


예쁜 눈을 하고는 서있는 그를 촉촉하게 쳐다보았다.


술의 힘이었을까?


겨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준우라면 소미에게 다가올 것이다. 가만히 기다렸다. 촉촉하면서 따뜻한 것이 다가올 것만 같았다.

주원은 서서 누워있는 겨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 옆에 누웠다. 하늘을 보니 별빛이 쏟아졌다. 별빛을 두 눈에 담아보려 한참을 하늘만 바라보았다.


“겨울이라 바닥이 차다. 여름엔 시원했는데. 나 먼저 들어간다.”


겨울은 결국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갔다.

겨울이 떠난 후, 주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달을 품은 바다를 응시했다.


“난 잔잔하게 차오르는 밀물, 서서히 빠져가는 썰물이 좋은데.”


주원은 혼잣말을 바닷가 모래에 새기고 방으로 돌아갔다.

가희가 돌아온 겨울에게 물었다. 가희는 혼자서 소주를 더 마셨는지 술에 잔뜩 취해있었다.


“둘이 뭐 했어?”

“나 먼저 씻을게.”


겨울의 말에 가희는 조금 신경 쓰였다. 10분 후 주원이 따라 들어왔다. 가희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주원은 가희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난 옆방에서 잘게.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


뭔가 수상한 분위기의 둘의 모습에 가희는 기분이 상했지만, 술기운에 이내 쓰러져 잠들었다.

새벽 2시.

겨울은 잠에서 깼다. 화장실 볼일을 보고 돌아와 누웠다. 가희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찾아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현관의 신발도 없었다. 불길했다.


겨울은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옆방으로 향하게 되었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그들을 보았다. 엉겨 붙어 풀래야 풀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 불같은 사랑에 빠져든 사람들 같았다.


결국, 겨울은 뒷걸음쳤다. 그녀는 매서운 겨울바람에 휘청였다.



*

주원의 하루는 길었다. 술에 취해 웅크린 채 잠에 빠져 있었다. 무언가 품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에 눈을 떴다.


"오늘 밤에 나, 해리이고 싶은데."


가희였다.


"난 강준우가 되지 못해."


주원이 대답했다.


"소설이잖아. 꾸며낸 이야기."

"서주원의 그늘이 너무 짙어. 해리가 사랑하지 않을 거야."


가희는 고개를 들어 그를 촉촉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넌 지금 해리 꿈에 나타난 준우야. 그녀가 무척 그리워 한 그 남자."


가희는 주원의 뺨에 두 손을 갖다 대며 속삭였다.


"그는 이 밤이 지나면 어차피 사라져. 그것만 생각해."


해리는 준우에게 키스했다. 주원은 가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삶의 무게로 눌려있던 몸이 날개를 단 듯 가벼워졌다. 해리에게 빠져들수록 주원은 해리의 남자가 되었다.


서주원과 서준우의 운명은 내일 뜰 아침 해에 맡긴 채, 그 밤에 그는 강준우가 되었다. 그녀가 미치도록 그리워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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