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곧장 화장실로 갔다. 부대끼는 속을 게워냈다. 모든 것을 다 토해내고야 세면대를 붙잡고 겨우 설 수 있었다. 수돗물을 틀어놓고 두 손으로 물을 모아 입안을 헹궈냈다. 입안에 찬기가 돌았다. 몽롱함은 저 멀리 달아나고 차가움만 입가에 머물렀다.
‘겨우 그도, 이 정도였어.’
겨울은 욕실을 나와 바닥열로 데워진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이불속 온기가 겨울을 감싸 주었다. 그곳만이 상처받은 영혼을 쉬게 했다.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려는 순간 옆 방의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소설 결말은 해피엔딩이니?’
결국 던지지 못할 질문이었다.
겨울은 두꺼운 겨울 이불을 덮어썼다. 겨우 잠들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찬 바다 공기에 눈을 떴다. 아직 동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띠리링.”
그때 문자가 울렸다.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확인하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화장실 세면대 앞으로 갔다.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소설이었어.’
겨울은 어제 일을 애써 소설 캐릭터들의 이야기, 배우들의 연기였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소설일 뿐이라고. 지난밤 일은 다 잊어버리겠다는 듯 찬물로 세수했다. 칫솔을 들고 입안에 남아있던 신맛도 제거했다.
‘겨울아, 못난 겨울아’
거울을 보며 겨울은 마음을 다잡았다. 개운한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문자를 보낸 건 주원이 아니었다. 가희였다.
“나 먼저 간다.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서.”
겨울은 그 문자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겨울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매점 쪽으로 걸어 나가니 통유리창 속으로 주원이 보였다. 먼지 쌓인 곳을 닦고, 컵을 정돈하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를 뒤로한 채 돌아서는 찰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밖으로 뛰어나왔다.
“커피···. 마시고 가.”
겨울은 거절하는 게 오히려 그를 의식하는 것 같다 생각했다.
“그래.”
겨울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매점으로 들어갔다.
“가희는 먼저 갔어.”
“응, 알아.”
겨울은 어색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원이 커피 두 잔을 내려 겨울에게로 왔다. 창가에 앉은 둘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고요한 바닷물결이 밀려오듯, 모닝커피 향이 콧속에 스며들 듯, 모든 게 천천히 조심스러웠다.
“소설 말이야.”
주원이 말을 꺼냈다. 겨울은 뒷말을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알바 때문에 못 할 것 같아.
“···.”
“가희랑 해.”
주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 겨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가봐야 할 것 같아.”
“커피 아직 많이 남았는데.”
“오후에 알바 가야 해서.”
“으음.”
“갈게.”
겨울은 애써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마시니 제법 상쾌했다.
“어, 눈이네.”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내리는 눈이 바닷물에 살포시 녹아내렸다.
겨울은 그 모습을 보고, 바다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눈이 바닷물과 입 맞추고 사라지는 모습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겨울은 밀려오는 바닷물에 발이 젖을 듯 아슬아슬하게 가까이 가고 있었다.
주원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매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 쪽으로 달렸다. 물에 빠질 듯한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겨울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위험해 보여서.”
주원의 말에 겨울이 말했다.
“사르르 녹는 눈이 너무 예뻐서 그만.”
주원은 겨울을 잡은 팔을 놓았다. 둘은 다시 매점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진짜 안녕.”
주원이 뒤돌아서는 겨울을 불렀다.
“잠시만.”
주원은 매점으로 돌아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날이 추워.”
주원은 그녀에게 빨간색 장갑을 건넸다.
“뭐야?”
“준우의 선물.”
겨울이 그 장갑을 받았다.
‘소미라면? 지금 이 순간 소미였다면?’
겨울은 주원 앞에서 기쁘게 장갑을 껴 보이며 좋아했다. 소설 속 사랑스러운 소미처럼.
“추웠는데 잘 됐다. 고마워. 간다.”
‘서주원, 이제 안녕.’
겨울은 미소를 띤 채 뒤돌아섰다.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미안해. 결국 소미의 준우가 되지 못해서.”
주원도 멀어지는 겨울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겨울방학이라 겨울과 가희는 학교에서 볼일이 없었다. 겨울은 가희에게, 가희는 겨울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가희는 계획대로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겨울은 이사를 했다.
이삿짐 중 서주원 작가 사인이 있는 가희책을 버렸다. 휴대폰 번호도 바꾸었다.
하지만, 차마 빨간 장갑은 버리지 못했다.
'준우 선물이니까. 준우가 소미한테 준 거니까.'
그렇게 멀어졌다.
일 년 후, 겨울은 다시 그 바닷가 매점을 찾게 되었다.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유치권 행사 중’
십여 년 만에 듣는 가희 목소리에 소미는 휘청했다. 소미로 개명 한 이후 '겨울'은 '겨울'을 버렸다. 새로 태어나려 했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이젠 겨울이 아님에도 그대로 아팠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소미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머그잔을 감싸 쥐고 겨우 마음을 달래는 중이었다. 힘 빠진 몸을 벽에 기댔다.
‘그때 나는 누구를 사랑한 걸까?’
자신이 사랑한 이가 준우든 주원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 순간이 아리고 궁금하다는 게 속상했다.
그가 남겨준 ‘소미’라는 이름을 품고 사는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알아. 이런 감정이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걸.
하지만, 그때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할 때가 있어.
어둡고 춥고 쓸쓸한 날이면
그게 몹시 궁금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