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겨울과 가희. 중간과 내용상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커피숍에 은경이 들어왔다. 아주 심각한 표정이었다. 소미는 아는 체하지 않고 그녀를 유심히 보았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과 차가운 것 한 잔 주세요.”
그녀는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뒤이어 한 남자가 매장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둘은 한 테이블에 앉았다.
“돈 좀 부쳐 줘.”
“없어.”
“마지막이야.”
은경은 단호했다.
“진짜 없어.”
“월급날이잖아.”
남자의 목소리가 소미 귀에 제법 익숙했다. 남자는 테이블 위 진동벨이 울리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를 받으러 가는 그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불현듯 뭔가 떠올랐다. 예전에 주원과 말다툼했던 남자란 게 생각났다.
태현은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곤 자리에 앉았다. 은경이 커피를 마시려 하자 태현이 말했다.
“뜨거워, 조심해.”
은경은 태현의 이런 다정함이 좋았다.
“요즘도 그 사람이 돈 보내?”
돈 얘기만 아니면 둘은 다툴 일이 없었다.
“어?”
“그 지현이 후원자. ‘써머 21’인가 하는.”
“아, 아니. 이제 안 보내.”
“에이. 부자면 돈 좀 나눠 주지. 살기도 팍팍한데.”
“그 사람도 힘들게 벌어서 후원하는 걸 수도 있잖아.”
“야! 돈이 넘쳐나니 제 돈을 남 주지. 먹고살기 빠듯하면 누가 돈을 남을 줘?”
“세상 사람이 다 너 같지만은 않아.”
“진짜! 너 오늘따라 왜 이래?”
은경은 화제를 돌리고 싶어 계산대로 갔다. 설탕 스틱 하나를 집어와 커피에 부었다.
“요즘 서주원 소식 없어? 책 안 써?”
“주원이는 또 왜 찾아?”
소미는 둘의 대화에 심장이 쿵했다. 그들 얘기에 더욱 귀 기울였다.
“가족으로 할 도리는 해야 할 거 아냐?”
“너희 가족이랑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상관이 왜 없어? 제 동생 병원비 댄다고 노인네들 허리가 휘는데.”
“사실 주원이랑 지현이는 남남이나 마찬가지잖아.”
“남남은 무슨.”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 남이지.”
“서지현이지, 강지현이야?”
“그만하자.”
대화는 은경이 입을 다물면서 중단됐다. 은경이 밖에 나가니 태현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
집에 돌아온 소미는 한참 잠 못 자고 뒤척였다.
머릿속이 엉켜서 복잡했지만, 한 가지 선명하게 잡히는 생각이 있었다.
그건 주원을 한 번은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빨간 장갑을 꼭 쥐고 겨우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소미는 소리숲 도서관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지만 가야 했다. 주원의 소식을 들으려면 은경을 만나야 했다.
“어, 또 오셨네요.”
“네. 여기서 작업이 잘 되는 것 같아서요.”
소미는 은경에게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리 준비해 온 테이크 아웃 커피를 건넸다.
“제 것 사면서 한 잔 더 샀어요.”
“안 이러셔도 되는데, 고맙습니다.”
“새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공기가 맑아서 너무 좋네요.”
“빨간 장갑 예쁘네요. 직접 뜬 것 같은데, 소미 씨 솜씨예요?”
“아뇨, 선물 받은 거예요.”
소미는 은경에게 '서주원 작가'에 대해 물어보려 했다. 그때 마침 도서관으로 전화가 와서 대화는 중단되었다.
소미는 큰 책장에 가려진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 자리에 앉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서고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청구기호 800번대로 향했다. '서'라는 글자를 찾기 위해 숱한 책들을 지나쳤다. 파란색 표지 앞에 멈춰 섰다. 다시 봐도 가슴이 뛰었다. 21살 처음 보자마자 겨울의 마음을 앗아갔던 서주원 작가 책이었다.
책을 꺼내 와 자리에 앉았다. 소미는 책을 머리맡에 베고 잠시 엎드렸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에 깜빡 잠이 들었다.
소미는 꿈속에서 준우를 만난다.
자그마한 야생화가 군데군데 피어있는 봄날의 잔디밭.
소미는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준우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둘은 한참을 웃는다.
잠결이었지만 소미는 느꼈다. 지금 자신이 봄 햇살 같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말이다. 파란색 책 '그리운 바다'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표지를 넘겨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20대에 읽었던 느낌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차마 알아채지 못한 작가의 숨겨진 심리상태도 제법 알 것 같았다.
책을 서가에 다시 꽂아두었다. 돌아 나오려는데 뭔가 그녀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겨울 눈과 눈부신 바다 윤슬이 섞인 표지였다. 의아한 책이었다. 도서관 고유 라벨이 붙어 있지 않았다. 제목도, 작가도, 출판사 정보도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소미는 첫 장을 조심스레 펼쳐보았다.
속표지에 적혀있는 제목을 보고 숨이 멎는 듯했다.
‘겨울의 봄’
속지 한두 장 더 넘겨보았다. 부제를 보는 순간 그가 떠올랐다.
‘내 것이 될까 봐 차마 다가가지 못한 너에게.’
소미는 책을 자리로 가져와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곳에 겨울이 있었다.
몹시도 추워 보이는 겨울이 있었다.
결국 그 겨울을 품지 못했다.
외로워 보였는데,
사랑하고 싶었는데.
짧지도 길지도 않은 빨간 털실이
나를 그 겨울에 데려다줄 거라 믿었다.
겨울의 겨울은 춥지 않기를
겨울의 봄이 곧 찾아오기를
바라고 바랐다.
소설 마지막을 읽는데 소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마지막 장을 펼쳤다.
<작가의 말>
소설에서는 영원하겠지.
소리샘 도서관 구석 자리에 엎드린다.
잠을 청한다. 꿈속에서 겨울을 만난다.
가까이 가게 된다.
뺨에 느껴지는 겨울의 봄.
솜털을 느끼며
꿈속에서 우린 영원을 꿈꾼다.
결국 소미는 흐느껴 울고 말았다. 그 소리에 은경이 조심스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은경은 조심스레 티슈를 건넸다. 그러곤 소미가 읽던 소설책을 발견했다.
“혹시?”
은경의 말에 소미가 고개를 들었다. 은경이 소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결국 찾아오셨군요.”
“네?”
“서 작가랑은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냈어요. 기관에서 함께 자랐거든요.”
소미가 은경의 말에 반응하자 은경은 확신했다.
“빨간 장갑을 낀 겨울이 소미 씨였군요. 잠시만요.”
은경은 자리로 돌아가 명함 한 장을 가지고 왔다. 소미에게 건넸다.
겨울의 봄
아이들이 따뜻한 희망을 품는 곳.
원장 서주원.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소설 '겨울의 봄'을 마무리합니다.
읽어주신 독자님들! 너무 감사했습니다.
쌀쌀한 날씨에도 마음만은 포근한 나날 되시길 바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