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2#03
결전의 날이 밝았다.
장비도 다 준비됐고, 상대방 정보도 다 습득했다.
두렵지만 그래도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
대만 수영장!
어학당 코스가 끝나니 남는 게 시간이었다. 주말이야 여행을 다니지만 평일에는 저녁 알바가 있어서 멀리 가진 못하고 타이베이에서 반나절을 보내야 했다. 자알. 그래서 그동안 미뤄뒀던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그 도전은 바로 '대만 수영장 가보기'였다.
대만 올 때 수영복을 챙겨 왔었다. 원래 수영을 좋아하는 데다 몇 년 전 대만 남쪽에 위치한 컨딩(墾丁)으로 여행 왔을 때 바다 위에서 둥둥 떠있었던 기억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이번에 반년 동안 지긋지긋한 대만 더위에 시달리고 나니 찬물에 몸을 푹 담그고 싶은 갈망이 더 커졌다.
그러나 도저히 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뭐랄까, 좀 무서웠다. 남의 나라에서 수영장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우리나라 수영장이랑 시스템이 다르면 어쩌지? 직원 말 잘못 알아들어서 실수하면 어쩌지?' 경험은 없고 걱정만 많은 나는 모든 준비가 끝났지만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한참 망설였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덧 12월이었지만 타이베이는 아직도 밖에서 걸으면 살짝 땀날 정도로 더웠기 때문이다. 목선 따라 흐르는 땀을 닦을 때마다 귀에서 수영장이 나를 유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한국인~ 덥지? 수영장에서 물장구 한판 어때? 엄~청 시원할 텐데?'
수영장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리던 어느 날. 드디어 수영장에 가기 위해 집에서 나섰다. 타이베이의 공유 자전거인 유바이크(U-bike) 바구니에 한국에서 챙겨 온 수영복과 며칠 전 까르푸에서 산 수경 등을 싣고 출발했다.
첫 도전지는 '다안(大安) 운동중심(運動中心)'. '다안'은 타이베이시의 구(區) 이름이고, '운동중심'은 '체육센터'로, 즉 '다안구민 체육센터'였다. 대만도 우리나라처럼 도시의 각 구마다 저렴한 비용의 구민 체육센터가 하나씩 있는데, 찾아보니 수영장도 다른 곳보다 저렴하면서 시설이 좋다고 했다.
다안 운동중심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운동중심으로, 자전거 타고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수영장 1회권은 원래 110위안(21년 12월 기준 한화 약 4,700원)인데, 학생은 80위안(약 3,500원)이었다. 어학당 학생증도 할인해주는지가 관건이었는데, 며칠 전 사전 답사 왔을 때 직원분께 여쭤보니 다행히 가능하다고 했다. 서른 살에 학생 할인이라니, 완전 땡큐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한 운동중심. 카운터에 가서 학생증 보여주고 돈을 내니 직원분이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을 건네줬다. 카드에는 '游泳學生卡', 즉 '수영 학생 카드'라고 적혀 있었다. 중국어로 적혀 있어서 그런지 카드부터 왠지 신기했다.
신기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발장과 수납장 같은 건 한국이랑 비슷했지만, 신발장 맞은편 벽 붙어 있는 포스터에 익숙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소매치기 주의'
'대만' 구민 체육센터 수영장에서 한국어를 보다니! 대만 여행 온 한국인들은 수영을 해도 호텔 수영장이나 바다에서 할 텐데, 이건 한국인 유학생들 위해서 써놓은 건가? 별거 아니지만 쬐끔 감동이었다.
수영장 이용 방법은 한국과 같았다. 먼저 샤워실에서 몸 씻고 수영복 입은 다음, 수영장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레일에서 수영하면 끝!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영법으로, 각자의 속도로 수영을 즐기는 모습도 한국이랑 비슷했다. 내가 갔던 시간대만 그런지 몰라도 강습이 없어서 좀 더 조용했다는 점만 빼면.
하지만 다안 운동중심 수영장에는 수영 레일 외에도 특별한 시설 세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아쿠아 마사지존, 건식 사우나 그리고 뜨끈한 온천탕이었다. 대형 워터파크나 호텔 수영장에나 있을 법한 시설들을 약 4천 원 내고 들어온 '구민 체육센터' 수영장에서 만난 것이다.
물속에서 땀날 정도로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수영한 다음 강한 수압으로 마사지를 받고, 건식 사우나에 들어가 잠깐 지지다가, 마지막으로 뜨끈뜨끈한 온천탕에 앉아 대만 할머니들의 수다를 들으며 잠깐 눈도 붙였다. 단지 수영을 하러 갔을 뿐인데, 반년 묵은 피로까지 싸악 풀리는 기분이었다. 정말 감동적인 복지 서비스였다. 다안구가 타이베이에서도 손꼽히는 부자 동네라더니, 역시 운동중심 수영장부터 남달랐다.
*실제로 다안 운동중심의 수영장이 시설 좋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큰 용기가 필요했던 대만 수영장 첫 도전.
그 이후 고작 두 번 더 간 뒤로 '대만 수영장 가보기' 미션은 막을 내렸다. 다소 허탈하게도.
어차피 몇 번 가고 말 걸 뭘 그리 망설였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만큼 잔뜩 쫄아있어서 이 날은 더욱 특별했다.
나와 내 세상이 수영장 레일 한 칸만큼 더 커진 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