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처럼 신나고 설레는 일은 없다.
폭풍같은 평일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평화로운 주말입니다.
방학 기간에만 집앞 학원에 다니는 큰 아이가 오자마자 치과로 향하고, 작은 아이는 보고 싶다는 잰말놀이 책을 찾아 도서관에 다녀오니 어느새 4시.
어디 멀리 가기엔 늦은 시간이라 간단히 뒷산에 오르기로 합니다.
주말 아침이면 늘 혼자서 뒷산에 오르는 큰아이라 어디에 무슨 새가 있는지 꿰뚫고 있는데요. 오늘도 그 자리에 수리가 있다며 아빠와 둘이 신나서 쌍안경을 보며 우와~우와~를 외치고 있네요.
멀리서 보더니 가까이에서도 관찰하겠다며 신나게 다시 산길을 올라가는데요. 이 나무인가? 저 나무인가?한참을 왔다갔다하며 알쏭달쏭해하다가 결국 돌아서서 다시 남산으로 향합니다.(집 뒷산은 남산으로 이어져 있거든요.)
요즘은 무장애길 데크길이 잘 조성되어 있더라구요. 데크길을 한참 가다보니 어느새 남산 초입입니다.
버스를 탈까 매번 갈 때마다 하는 고민이지만,
오늘도 역시나 걷는 길을 택합니다. 버스를 타면 편하기는 하지만 놓치게 되는 것들이 많거든요. 산을 좋아하는 큰 아이는 늘 버스보다 산을 직접 오르는 걸 선택하기도 하고요.
오르는 길은 늘 같은데 작은 아이 눈에 샛길 계단이 하나 눈에 띄었나 봅니다. 한양도성순성길이라고 적혀 있는 계단길이었는데요,
방과후 역사 선생님이 워~~~낙 재미있는 분이었어서인지 아니면 역사를 좋아해서 역사이야기를 종종하는 가족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아이는 역사 유적들을 참 좋아합니다. 특히 서울의 도성, 4대문에 얽힌 이야기, 왕조 이야기,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얽힌 여러 역사 에피소드들을 좋아하지요.
그런 연유로 남산에 오를 때면 역사 이야기들을 종종 나누곤 하는데, 그러다보니 종종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하루는 저랑 작은 아이가 대화를 나누는 걸 옆에서 지나가던 이가 듣더니
와! 여기까지 와서 공부시키는 거야?정말 대단하다 대단해!(물론 비꼬는 말투였겠죠?)
자기들끼리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대화하는 걸 뒤에서 따라오던 큰 아이가 듣고 전해준 적도 있었습니다. 옆에서 그 얘기를 들은 작은 아이는 알쏭달쏭해하며
내가 물어본 건데 뭐가 문제에요?
라고 조그맣게 속삭여주었구요.
(하지만 졸지에 오해 받는 에미는 속상하긴 합니다.)
어쨌든 작은 아이가 저 계단길로 가보자 하니 모두에게 새로운 곳으로 가보자고 제안을 했고, 모두가 흔쾌히 동의합니다.(뜻밖의 모험으로 즐거웠던 경험이 여러번 있어서 작은 아이의 말이 더 반가웠던 듯 합니다.)
계단을 오르는 초입에 웬 고양이가 눈에 띕니다. 사람이 있는데 도망 가지도 않고 마치 놀아달라는 개구진 표정같기도 했는지 아이들이 나뭇가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놀아주기 시작합니다.
도망가지도 않고 나뭇가지를 잡으며 대담하게 인간을 바라보는 고양이를 보니 사람 손을 탄 것 같은데 역시나 몇 계단 올라가니 사람이 부어주고 간 사료가 보이네요. 사냥할 필요는 없으니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놀아달라고 한 것 같기도 하네요.
그렇게 한참을 놀아주고 나서야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성 쌓는 아이 라는 동화책을 보면 다친 아비 대신 아이가 성을 쌓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세종 때도 그랬고 그 뒤에도 그랬고 성 쌓을 때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동원하다보니 몇 달 이상을 집의 가장이 집 비워야 하다보니 남은 식솔들의 삶도 고생스러웠을테고,
몸에 익지도 않은 일을 해야 했던 가장들의 고생도 말로 못할 정도였겠죠. 남산 위에 얼마 남지 않은 성곽들을 바라볼 때면 그 당시 조상들의 어려웠던 삶의 모습이 떠오르더라구요.
오늘은 도성길을 따라 걷는 길이라 도성의 모습이 더 눈에 잘 들어옵니다.
이걸 설명하다가 지난 번 그 오해를 받았던 것이긴 한데요...(사교육 열풍 때문인가요?졸지에 교육열이 강한 에미가 되었네요)
말로만 듣던 각자성석입니다.
각 지역에서 차출된 백성들이 성을 쌓다보면 무너지는 곳도 있는데 이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도 있고,
쌓을 때 더 성의있게 쌓기 위해서 돌에 이 곳 성벽을 만든 동네와 사람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하죠.
이미 바람에 깎이고 깎여 탁본을 떠야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인 글자들도 있고, 아직 글자가 선명하게 남은 글자도 있더라구요. 저 또한 말로만 듣다가 직접 보니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런게 살아있는 역사교육이 아닐까요? 문제집으로 푸는 역사 교육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배우는 역사 교육이잖아요.
(뭐. 교육열 높은 대치동 헬리콥터 맘 취급 받아도 상관 없습니다. 저희 가정 나름의 역사 교육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뭐. 문제 있나요?)
아이들 각자 요즘 천자문 필사를 하다보니 아는 글자가 나올 때면 글자를 맞추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그 긴 계단(작은 아이 말로는 777개라고 하네요.^^)를 무사히 잘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풍경이 참 멋지네요.
계단 끝에서 다시 내리막길로 향하는 계단이 보입니다.
아찔한 전망대를 지나 계단을 내려와 한참을 걷다보니 익숙한 길과 합류하네요. 늘 가던 남산길이었어요.
저 길은 어디로 향할까?
궁금했던 길이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오게 되네요.
저 멀리 지빠귀가 보이나요?
남산의 노을을 바라보며 버스에 오릅니다.
내려와서 버스를 갈아타려니 웬 외국인이 길을 물어보네요. 흠. 영어 못하는데...
버스에 오르려는 저희에게 필사적으로 묻는 외국인. 한참 영어를 배우고 있는 두 아이들 앞에서 결국 오르려던 버스에서 내려 버스노선도를 같이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외국인이 찾던 그 교회가 어딨는지 노선도에는 없고, 버스는 다시 와버렸고... 미안하지만 ㅇㅇㅇ 버스일 것 같다는 말만 남기고 차에 오릅니다. (죄송해요..)
그렇게 주말의 첫 하루도 흘러갑니다.
내일은 어떤 일상일지,
같은 하루지만 결코 같지 않은 매일을 보내고 있음에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