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와 내복

버리지 못하는 기억 3. 어린 시절 받은 큰 사랑

by 은영

"우리 아버지 정말 멋지지?"

엄마가 내민 흑백 사진 속 외할아버지는 요즘 기준으로도 정말 훈남이다. 내게는 가깝지만 참 멀게만 느껴졌던 외할아버지. 그에게 이런 찬란한 청춘이 있었는지는 차마 알지 못했다. 엄마는 내게 카메라 성능이 좋은 나의 스마트폰으로 그 사진을 좀 찍어보라고 했다. 사진을 찍어서 엄마에게 보내면 엄마는 저장하기를 눌러서 자신의 앨범에 다운로드할 것이다. 그리고 가까운 이들과 하는 SNS에 그 사진을 올릴 테지. 지금은 볼 수 없어 그리운 아버지의 모습을.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풍경이 있다. 외할머니와 함께 까만 개 한 마리를 키우시며 언덕 위의 마당 있는 집을 지키시던 모습이다. 외할아버지의 방문을 열면 맞은편 옷걸이에는 늘 의수가 걸려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대게 그것을 하지 않으셨다. 결혼식과 같이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항상 그 옷걸이에 걸어 두셨다. 한쪽 소매를 펄럭거리며 나를 지긋이 바라보시던 그 눈길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뒤 사고가 났다고 했다. 자동차 정비 공장에서 일하셨던 외할아버지는 컨베이어 벨트 기계를 고치시다 팔을 잃으셨다. 2인 1조가 되어 작업을 해야 하는 공장에 그런 여건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지금 서른셋이니 벌써 30년도 지난 일인데 여전히 그때와 같은 사고가 심심치 않게 보도된다. 기술산업의 빠른 성장 속도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며 입을 모으는데 왜 이런 일은 속도가 붙지 않는 것인지, 어쩌면 그 시대에 사회는 멈춰있고 그저 컨베이어 벨트만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린 마음에 나는 그런 모습의 외할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람들과 다른 그 모습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주변에서 내게 알려준 이가 없었다. 그런 손녀의 마음을 아셨는지 외할아버지는 내게 일부러 다가오시진 않았다. 그게 외할아버지와 나의 거리였다.

게다가 엄마의 시집살이는 정말이지 지독했다. 내 어린 시절 엄마는 화장실에서 무선 전화기로 이모들에게 전화를 하며 울던 모습이 일상적으로 그려진다. 그런 엄마에게 친정을 가보는 일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내게도 외가를 가는 일은 막연하게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외할아버지와 나의 거리만큼 참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이미 멀어진 거리를 좁힐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도 이젠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로 우리는 오랜만에 외가가 있는 안동을 향했다. 그 집은 온 데 간데없고 외조부모님은 아파트에서 살고 계셨다. 일가친척들도 모인 날이었다. 나는 학교를 다니고 저학년도 아닌 어엿한 후배들이 있는 학년의 나이였다. 외할아버지는 나를 보시더니 조금 놀라시며 엄마에게 까만 비닐봉지를 쓱 내밀었다. 그리고 엄마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묻어났다.

"이게 뭐야. 내복?"

21_20 long underwear.png 외할아버지가 사 오신 내복

흰 바탕에 온갖 핑크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내복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그것이 내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내가 입기에는 턱없이 작은 사이즈의 내복이었다. 외할아버지의 기억 속에 나는 그가 사 오신 내복을 입을 수 있는 나이에 멈춰있었던 거다. 오랜만에 남편을 잃고 오누이를 혼자 안간힘으로 키우던 딸이 온다는 소식에 무언가라도 챙겨주고 싶으셨을 뿐이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내복을 들고 있던 손에는 참외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근데 그거 아버지 반지 팔아서 사신 거라더라."

어느 날 보니 노인이 하던 반지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다 늙은 사람이 반지는 껴서 뭐하냐며, 없는 살림에 반지라도 팔아서 딸과 그 어린 자식들을 맞이하고 싶으셨던 외할아버지. 나는 왠지 내가 받아본 외할아버지의 사랑 중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8월 15일. 보통 기일은 음력으로 치지만 광복절이라 공휴일이기도 한 이날을 우리 가족은 외할아버지의 기일로 지내기로 했다. 그날이 다가오면 난 늘 이 기억을 떠올린다.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내복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그 내복을 입고 있는 것처럼 몸안의 온기가 가득 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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