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멍난 주전자 >
이종섭
뜨거워진 주전자 속에서
고요하던 한잔의 물이 끓었다.
격정이 거듭될수록 분리되는 객체는
허공 속 어디론가
슬금슬금 달아나고 있었다.
현실도 파악 못한 눈 먼 주전자는
바닥이 나자 혼자 애태우며 붉게 달궈졌지만
끝내는 꺼져가는 불과 함께
숯덩이처럼 검게 주저앉고 말았다.
주전자는 데우기 위해 존재하며
물은 사라지기 위해 끓는 것
적당히 데우다 말 것이지
시기를 놓쳐버린 흉한 몰골의 주전자엔
어떠한 물도 다시 데울 수 없이
헛바람만 숭숭 들락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