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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 1

줏대 있는 선택

by 스마일

중3 겨울방학이 되었고, 엄마를 졸라 강북의 한 대형학원 겨울특강을 들었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이른 아침 학원 버스에 몸을 싣었다. 학원 버스에서 바라본 하얀 눈길, 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오던 차가운 공기, 그리고 건조한 히터바람이 기억난다.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에 가득 찼던 마음이 기억난다. 16살의 나는 겁이 많았지만, 욕심도 많았다. 잘하고 싶다, 잘할 수 있다, 잘해보자, 이런 마음이 있었다.



그냥 잘하기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여러 과목을 배웠지만, 내가 좋아하는 과목이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는 없었다. 한국의 교육환경과 입시제도가 그렇듯, 개인의 적성을 탐구할 시간이 우리에겐 없었다. 내신 성적 잘 받기 위해 모든 과목이든 '그냥' '잘' 해내야만 했다.


나는 배구를 책으로 마스터했다. 체육 과목 또한 내신에 포함되기 때문에 시험은 잘 봐야 했고, 태어나서 한 번도 배구 게임을 한 적도, 본 적도 없었지만 공 잡는 법부터 서브 자세, 각종 게임 규칙을 달달 외웠다. 이렇게 배운 스포츠는 배구, 골프, 수영, 검도, 씨름 등등.. 초등학교 저학년 때 엄마 따라서 다녔던 수영장에서 배운 수영 빼고, 그 외 다른 스포츠를 '진짜' 배워볼 기회는 없었다.




신기한 유전자

그나마 과학 과목, 특히 생물이 재밌었다. 거대한 에너지의 체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물리보다,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원자식 분자식 전자를 공부하는 화학보다 내 삶에 직접 맞닿아있는 생물이 참 흥미로웠다. 우리 몸의 소화과정에 대해 처음 배웠을 때, 위장과 소장에서 나오는 각종 소화효소들이 내가 먹은 음식을 어떻게 분해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분해된 각종 영양소들이 어떻게 세포로 들어가는지, 세포 내에서 어떻게 대사를 하며 에너지를 만들어내는지, 식물과 동물은 각각 어떤 방법으로 에너지를 얻으며 살아가는지 배울 때마다 혼자 그 과정을 상상해보곤 했다. 세포 안에 있는 염색체와 유전자로 생김새가 모두 다른 인간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정말 신기했다.




황우석 박사 스캔들과 나의 진로

나의 이런 작은 재미가 생물학에 대한 불씨였다면, 이 불씨가 활활 타오르게 되었던 건 당시 우리나라의 황우석 박사 열풍이었다. 뉴스는 온통 그 박사님의 연구 소식으로 가득했다. 그와 함께 일하고 있는 연구진들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을 정도로 국민적 관심은 대단했다. 그즈음 세포 대사, 유전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나는 진로에 대한 고민을 건너뛰었다. 그 상황에서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도 뉴스에 나온 그 연구원들처럼 흰색 가운을 입고 현미경을 보며, 세포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 황우석 박사의 사이언스 논문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회에 꽤나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분야의 전공에 대한 인기가 순식간에 식기도 했다. 하지만 세포를 연구하고 싶다는 나의 꿈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워낙 오래전이라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추측 1) 뉴스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던 아이돌이 어떤 구설수에 휘말리면 실망하기보단 먼저 조작된 가짜 내용일 수 있다고 하며 믿지 못하는 것처럼. 어린 내 마음에 꿈을 갖게 해 주었고, 같은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랑스러웠던 나의 롤모델이 어느 날 날개 잃고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애써 외면했었던 건 아닐까?


추측 2) 황우석 박사가 유명해지면서 누군가 내 꿈을 물어봤을 때 설명하기 편해진 부분은 있었다. 하지만 사실 세포생물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사회적 관심을 받기 전부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우석 박사 스캔들과 무관하게 나는 그냥 생물이 좋아서 (플러스, 물리/화학이 싫어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의심은 없었던 것 같다.




좋아하는 걸 좋아해서 다행이야

어쨌든 고등학교 3년 내내 생물을 좋아했었고, 전공 선택에 대한 고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수능시험을 보고 나서 가/나/다군에 지원할 때 3개의 대학 모두 생명공학 전공을 선택했다. 인생에서 거의 유일했던, 뚝심 있는 결정이었다. 나 자신의 흥미와 적성에 대해 깊게 고민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재미를 느끼고 잘하고자 하는 마음에 드는 분야를 찾았으니 말이다.


사실 내 인생은 대학교 졸업 이후로 쭉 방황이었다. (지금도 방황 중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중요하고,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특별해지고 싶다는 강박에 주체적이지 못한 자세로 결정을 내리며 살아왔다. 생물을 전공으로 선택했던 일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고 나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거의 유일한 결심이다. 다행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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