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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밥벌이하려는 건데

그땐 왜 그렇게 불안했을까

by 스마일

생명공학자가 되기로 굳은 결심을 했지만,

막상 대학에 오니 이런저런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방감 맛보던 1학년

신입생일 때는 그저 입시 지옥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났던 우리는, 부대찌개 하나를 가운데 두고 바닥이 보일 정도로 끓이고 또 끓여서 졸아들 때까지 소주를 마셨다. 신입생 환영회라고 해서 갔더니, 한 명씩 나와 자기 이름을 외치고 막걸리 한 사발을 드링킹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왜들 그리 술을 마셨는지 모르겠다. 대학생이 되었다는, 어른이 되었다는 걸 증명해 보이기 위한 과정이었나 보다. 그래서 '어른처럼 놀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술을 못 마시면 친구들이 '잔챙이'라고 불렀다. (ㅎㅎ) 잔챙이라 불려지는 순간 체력도 정신력도 맹숭맹숭한 사람이라고 간주되는 것 같아서 악착같이 소주를 마셔댔다.


제주도, 울산,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내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고향을 떠나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고, 우리는 종종 기숙사 세탁실에서 탕수육을 시켜 먹으며 의미 없는 농담을 하고, 서로의 연애에 대해 간섭하고 그러다가 몇몇은 자기들끼리 몰래 눈이 맞기도 하고.. 유치하면서도 매일매일이 신났던 것 같다. 내향인이었던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기숙사 방에서 그냥 혼자 노는 게 더 좋았지만, I도 바깥으로 불러낼 수 있을 만큼 신입생 시절의 '놀기'는 참 재밌었다.



진로에 대해 고민한 2학년

당시 우리는 학부로 1학년에 입학해서 기초 과목을 이수한 다음, 2학년 때부터 전공을 선택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술만 마시고 생각 없이 놀던 친구들도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각자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둘 의학전문대학원에 가야겠다며, 의전 시험과목을 많이 가르치는 전공을 선택하는 친구들이 보였다.


당시 나는 그 친구들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나는 그때까지도 '수능'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좋은 나머지 모든 종류의 시험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듯하다. 암기를 하고, 답이 정해진 시험을 보고, 점수와 등급을 매기는 표준화된 시험이라면 시작 조차 하기 싫었다. 다시는 그 스트레스의 구덩이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1년 동안 느슨해진 정신으로는 다시 책상에 진득하게 앉아 공부하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 대학에 왔고 이제야 조금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나라는 사람을 또다시 시험 점수로 줄 세우고 싶지 않았다.




전공 공부에 집중한 3학년

어떤 친구들은 의전시험(MEET)을, 또 다른 친구들은 치의학전문대학원 시험(DEET)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친구들 중에는 벌써 일주일에 한두 번 교수님의 연구실로 출근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1학년과 2학년을 거치며 학점을 잘 받는 방법을 터득했던 나는 3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공 공부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교수님의 성향에 따라 요령껏 시험 준비를 하고, 각 과목의 교수님들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로 리포트를 썼다. A교수님은 무조건 양이 많아야 하니까 같은 말을 한 10번쯤 반복하는 리포트를, B교수님은 창의적인 생각을 좋아하시니 다소 엉뚱하고 과하다 싶을 정도의 논지를 펼치는 리포트를 작성하는 식으로 말이다. 학점이 조금씩 올라갔고, 그럴수록 더 잘하고 싶었다.


생물학에 대한 흥미도 여전해서 세포생물학 수업이 참 재밌었다. 유전학과 생화학은 좀 어렵긴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세포생물학을 토대로 해서 거시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TCA 회로를 구성하는 물질들의 화학식을 암기하는 생화학은 어려웠지만, TCA 회로를 통해 세포가 에너지를 얻고, 우리 몸의 근육과 장기들이 에너지를 얻고, 신경세포가 활성화되고, 최종적으로 생명으로서 기능한다고 생각하며 혼자서 상상하기를 즐겼다. 유전자의 점 돌연변이나 시퀀싱의 원리 등을 배우는 유전학은 어려웠지만 각 유전자들이 어떻게 전사/번역되어 우리 세포와 몸에 필요한 단백질을 합성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빨리 길을 찾고 싶었던 4학년

그렇다면 연구실에 들어가 조금 더 공부를 해봐도 좋았을 텐데, 당시의 나는 너무나 불안하고 조급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겨우 23살이었는데,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었던 나이였는데, 조금 넘어지며 시행착오를 겪어도 좋았으련만. 물론 나이가 든 지금에야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안다.


뒤늦게 의전 입시에 대한 고민도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대학 기말리포트는 논리적이기만 하면 내 주장을 맘껏 펼쳐도 되었고, 여러 과목을 융합해서 리포트를 작성하면 더 좋은 점수를 받기도 했는데, 획일화된 정답을 적고 5지 선다형 문제를 읽으며 고민하는 식의 공부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런 식의 공부가 싫기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런 식의 정답을 요하는 시험에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대학원 진학 역시 망설였다. 당시 우리 전공에는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선배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떤 선배는 박사과정만 6년째 하고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선배는 박사를 하다가 수료만 한 채 졸업은 못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의 창창한 20대를 그렇게 연구실 구석에서 보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박사가 되어도 유학길에 올라 교수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은 기업체에 취직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결국은 밥벌이를 하기 위한 고민이므로 굳이 박사를 받고 취업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박사가 아니어도 학사로 밥벌이를 시작하면 일찍 돈을 벌 수 있고, 경력도 쌓이니 더 좋아 보였다. 무엇보다 20대에 사회생활을 하고 싶었다. 박사 다 마치고 30대가 되어서야 겨우 첫 월급을 받는 인생은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 어차피 이 모든 것이 밥벌이를 위한 것이라면, 그냥 일찍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은가'

그렇게 나는 전공 공부가 재밌었음에도, 대학원은 내 길이 아니라고 단정 지어버렸다.

그리고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스펙'을 쌓아가며 졸업할 날을 기다렸다.

토플, 교환학생, 인턴, 동아리 등등..



시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후회가 되는 선택이 많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내 결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다.
이는 내가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과거의 선택을 돌이켜보며 아쉬운 부분들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면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나침반으로 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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