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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가 무서워 도전하지 못했던 날들

백수의 조급함

by 스마일
가난한 마음

23살에 입사했던 첫 회사를 24살에 그만두고 나서 처음엔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궁상맞아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회사에 다닐 땐 커피 한잔 사 먹는 것이 그렇게 사치가 아니었지만, 월급이 없어지고 나니 2천 원짜리 커피 한잔을 사 먹는 것도 분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꼭 그렇게까지 나 자신을 몰아세우지는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그깟 커피 좀 사 먹으면 어떤가. 커피 한잔도 사서 마실 수 없을 만큼 지갑이 얇았던 게 아니라 마음이 가난했다. 여유가 없었다. 가난한 취준생으로 살지 않고 여유 있게 지내면 다시 실패할 것 같았다. 커피를 사서 마신다는 건, 멀쩡한 직장을 박차고 나오면서까지 내가 이루려고 하는 그 무언가를 손에 쥐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일상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미련했지만 그땐 그랬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희생해야만, 감내해야만 다시 행복한 시간이 찾아올 것이라는, 그런 고집스러운 미신이 나에겐 있었다.


나를 잡아먹은 조급함

직장을 뛰쳐나와 내가 이루려고 했던 건 겨우 남들 눈에 멋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두루뭉술한 무언가였다. 그게 무엇인지, 무엇을 이루어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질 것인지 나 스스로도 몰랐다. 어떤 일을 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은 생략한 채 작은 상자와도 공간에 나를 가두었다. 코피 나도록 열심히 하고 싶은데,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전문직'이 목표였는데, 의사, 변호사, 변리사, 약사 이렇게 네 가지의 직업을 생각했다. 당시엔 의대/약대가 없어지고 전문대학원 체제로 바뀌었던 시기였고, 또한 법학전문대학원도 생겨나 선택지는 꽤 많았다. 변리사의 경우 자연계 전공자인 나에게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높은 고시 중 하나였다.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전문직을 갖겠다고 회사까지 그만두었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시험, 고시라는 단어만 보아도 주눅이 들었다. 회사를 관둘 때는 다 자신 있었고, 지옥 같은 회사만 벗어날 수 있다면 '공부가 뭐가 힘들까', '공부가 제일 쉽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다. 막상 다시 세상에 던져지니 시험은 너무 무서웠고, 책상에 앉으면 1시간이 너무 더디 흘러갔고, 한때 교과서도 달달 외우던 시절이 있었건만 아무리 깜지를 하며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외우려고 해도 그렇게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더라. 괴로웠다. 그리고 초초했다. 이렇게 몇 년을 보내면 난 금방 인생의 실패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급했다. 다급할수록 책은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근차근 나아가야 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신촌의 한 대형학원에 전문대학원 입시를 위한 고시반에 등록을 했는데, 생각보다 학원비가 너무 비싸 놀랐다. 1년도 채우지 못한 나의 직장 생활에서 월급으로 받아 저축한 돈으로는 택도 없었다.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엄마 세탁기를 바꿔드리면서 그렇게 뿌듯했는데 다시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렇게 도와주셨으니 내가 더 열심히 하자. 좋은 결과 있도록 집중하자."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도와주셨는데도 내가 실패하면 어떡하지? 이 생활이 길어지면 어떡하지?"

내 생각은 이렇게 흘러갔다. 조바심 났고, 우울했다.


한번 해보자 vs 이걸 언제 다해

어떤 수재가 와도 한 달 만에 한 과목을 다 공부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도 난 하루하루 조바심으로 나 스스로를 잡아먹었다. 내용이 어려워서 한 두 페이지를 이해하는 것에 4~5시간을 할애한 날이면 밤에 우울감이 너무 심해졌다. 1~2년 시험 준비한다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 좋았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두꺼운 책을 보면서 '여기 있는 내용들을 내가 열심히 알아가야겠다'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걸 언제 다 하지? 내가 과연 이걸 다 할 수는 있는 걸까?'


40을 바라보는 지금도,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가장 독이 되는 것은 조바심이고, 가장 약이 되는 것은 꾸준함이라는 너무도 평범하고 진부한 진리를 마음에 되새기곤 한다. 특히 이제 막 학령기에 접어든 아들이 재밌게 학습지를 풀다가도 조금만 어려워지거나 양이 많아 보이면 너무나 서럽게 운다.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잔소리를 많이 하게 된다.


"무엇이든지 쉽게 되는 건 없어. 처음부터 다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러니 우리 차근차근해 보자. 오늘은 한 문제만 풀더라도 괜찮아.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한 거잖아."


사실 이건 20대의 나, 돌아온 백수가 되어 독서실에서 혼자 울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간다면,


#1

공부 잘 안 될 때는 나가서 돈 내고 커피 한잔 사 먹을 것이다. 돈을 벌지 못하는 시기라고 해서 나 자신을 너무 옥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행복일 테니까.

#2

비싼 학원비를 생각해서라도 이 악물고 더 열심히 할 거다. 이 생활이 길어질까 봐, 계속 부모님께 학원비로 손을 벌리게 될까 봐 초조한 나머지 공부에 집중을 못했던 날들이 후회된다.


그리고 이제는,

#1

나와 비슷한 성격의 내 아이가 조급함을 보일 때마다 그동안 엄마가 살면서 깨달은 것들에 대해 차분하게 말해주고 싶다. 아이가 힘들어할 때마다 든든하게 응원해 주고 싶다.

#2

조급함에 떨며, 스스로를 괴롭히던 젊은 날의 나 역시도 나의 모습임을 알기에. 당시엔 늘 최선의 선택을 해왔고 그것이 최선이었음을 알기에. 그때의 나를 너무 후회하지는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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