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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텅 빈 방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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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은 Jul 09. 2022

물에 잠긴 시와 씹던 껌

- 베를린, 폴란드 일기 8

글이나 영상, 혹은 직접 먹어본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된 음식이나 식재료들이 있다. 특히 책에서 본 낯선 재료들은 어떤 맛일지 늘 궁금했다.

노르웨이에 들렀을 때는 말로만 들었던 청어 통조림을 직접 먹었다. 그리고 그걸 빵에 올려놓고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따라 해봤지만, 내가 평생 먹어온 식습관대로 김치 한쪽이나 생강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 

‘납작 복숭아’도 마찬가지다. 복숭아는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과일에 포함되기 때문에 조식이 나오는 숙소에서는 먹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가 들른 6월에는 납작 복숭아가 나오는 철이어서 슈퍼마켓에서 살 수 있었다. 딱딱한 복숭아와 식감은 비슷했고, 맛은 백도와 황도 중간쯤이었다. 한국에는 천도 복숭아가 나올 즈음인데, 유럽에는 납작 복숭아가 나온다.

이걸 슈퍼마켓에서 사서 여행 내내 즐겨 먹었다. 다행히 둘 다 복숭아 알러지가 없고, 맛있게 즐겼다. 잠깐 벤치에 앉아서 숙소에서 씻어서 가지고 나온 납작 복숭아를 베어물면 달콤함과 아삭함, 물기가 입안을 채웠다.

“이런 맛이구나!”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을 상징하는 관문이다. 이 뒤로 베를린 장벽이 있을 때도 있고, 문 위 장식이 사라진 때도 있고, 이 문에 나치당 깃발을 길게 늘어뜨린 채 독일군이 진군하던 때도 있고, 2차 대전 때 파괴되었다.

운터 덴 린덴 서쪽 끝에 있고, 동과 서 베를린 경계선 근처에 있다. 이 문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프로필라이아를 본떠서 세웠고, 4마리 말이 이끄는 2륜 마차 ‘승리의 콰드리가’가 있다. 전쟁으로 파괴된 문은 1957~8년에 다시 지었고, 동상도 원형대로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2차 대전 직후 베를린의 모습을 찍은 사진에도 파괴된 브란덴부르크 문을 확인할 수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는 관광객들이 늘 북적인다. 

  

이 문을 지나 운터 덴 린덴을 걸어 내려와, 불투명한 유리벽과 문처럼 뚫린 사각형 틀을 만났다. 그 곳으로 들어서서 ‘신티와 로마 기념비(Sinti – und – Roma – Denkmal)’과 마주했다. ‘신티와 로마’는 ‘집시’를 의미하는 단어로, 독일에서는 ‘집시’라는 단어가 차별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대신 ‘신티와 로마’로 썼다.

‘신티와 로마 기념비’는 2차 대전 때 박해를 받은 신티와 로마를 추모하는 기념비다. 원형 틀에는 얕은 물이 고였고, 가운데에 삼각형 조형물이 있다. 물가에는 단어가 잠겨서 눈길을 끈다. ‘without words’, 그 문장을 발견하고 옆으로 옮겨갔다. 이 단어들은 ‘시’였고, 그 시 전문은 입구에 따로 새겨져 있다. 이탈리안 신티와 로마가 만든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나라없이 떠도는 이들이 수용소로 끌려갔을 때, 그들이 당한 고통과 흘린 눈물들이 이 물에 녹아서 흐른다. 물에 잠긴 시가 눈물처럼 흐른다. 말없이 흐른다.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2차 세계대전 때 일어난, 유대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제노사이드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기념물이다. 네모 반듯한 조형물들이 입구에서 맞이하고,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높이가 생긴다. 어느새 조형물은 나무처럼 내 키를 훌쩍 넘어서고, 바닥은 구불구불하다. 

희생자들을 위한 묘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라는 단어가 그리스어로 ‘짐승을 불태워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유대인 학살이 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는 행위로 비유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대재앙’을 의미하는 ‘쇼아(Shoah)’라는 단어를 쓴다. 

그래서 요즘은 ‘홀로코스트’라는 단어 대신 ‘제노사이드’는 ‘집단 살해’, ‘대량 학살’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청소녀와 청소년들과 마주쳤다. 6월은 수학여행 기간이라, 아이들이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디를 가더라도 아이들과 마주칠 수 있는데 이들이 많이 가는 곳에는 여행자들이 가지 않는 곳들도 많다. 조금 전에 들렀던 ‘신티와 로마 기념비’도 마찬가지다.

‘홀로코스트 추모비’에서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선생님 혹은 가이드가 설명하는 모둠을 여럿 만났다. 입구에서 설명하고, 자유롭게 걷게 한 다음 지하에 있는 전시실로 이동한다.

아이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난 뒤 다시 까불거리며 웃음을 내뿜는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이다.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총통의 벙커’가 있다. 이곳은 히틀러가 자살한 벙커가 있던 자리다. 지금은 표지판만 있는, 주차장이다. 여행자들이 굳이 찾아오지 않는 곳이지만 학생들과 선생님은 이곳까지 찾아와서 끔찍한 폭력을 저질렀던 사람의 최후가 어땠는지 알린다.

아이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차들이 무심하게 왔다갔다 하는 이 자리를 둘러보다가,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를 귀기울이는 학생들을 보았다. 독일에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도 섞여 있다. 최근 독일 교육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특정해서 알리는 것보다 과거에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과 반인권적인 일들을 알리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한다.     

포츠담 광장에 세워진 장벽에는 시민들이 참여한 흔적이 있다. 씹던 껌을 붙여서 요철이 생기게 만든 것이다. 색이 다른 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이룬 모양이 흥미로웠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처럼 화가가 참여해서 베를린 장벽을 꾸민 경우도 있지만, 그 동안 독일을 동서로 나눴던 장벽들이 철거될 때 여기저기 흩어져 전시되었다. 우리 나라에도 장벽 일부가 와 있다. 첫 숙소 근처에도 장벽이 서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이 만든 흔적이 켜켜이 쌓인 포츠담 광장의 장벽도 근사했다. 오래된 껌부터 최근에 붙인 것 같은 껌까지, 씹던 껌을 붙이느라 꾹 누른 손자국이 남아 있는 장벽이 말을 걸었다.

“이젠 더 이상 유해하지 않아요. 씹던 껌을 붙여도 될 정도니까요.”     


광장 한쪽에 놓인 커다란 인물 사진에서 ‘한국인’을 발견했다. 그가 누군지 모르지만 반가웠다. 배낭 여행 중에 가장 반가운 사람은 내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 한국인이다. 내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한국인에게 맡기면, 그 사람은 열과 성을 다해 사진을 찍는다. 한 장 두 장이 아니라 연속으로 몇 장을 찍은 뒤 꼭 확인해보라고 한다.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찍어주겠다고.     


안타깝게도 이번 여행에서는 카메라와 휴대폰을 맡길 한국인을 만나지 못했다. 가끔 길에서 부딪혔지만, 우리가 사진을 찍고 싶을 때는 주위에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는 고프로로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했고, 커플 사진을 부탁하는 외국인에게 사진을 찍어준 뒤 우리 사진을 부탁하기도 했다.

종종 사진 각도가 잘 나오게 하려고 무릎을 꿇거나 몸을 반쯤 낮추기도 하는데, 그런 자세를 취하면 상대방은 깜짝 놀란다.      


부부가 같이 찍은 사진이 몇 장밖에 없지만, 다 마음에 들었다. 우리 사진도 찍어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서 소통한 마음까지 느껴졌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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