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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Sep 11. 2024

간병일기 81

화상 입은 아들

화상 입은 아들


어릴 때부터 폭우가 쏟아지면 세상이 개벽이라도 될 것 같아 괜시리 마음이 들뜨곤 했다. 오늘 날씨도 그랬다.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낮은 하늘 아래로 장대비가 쏟아졌다. 시원하게 내리퍼붓는 것이 기분이 좋다. 하지만 지나가는 소나기였는지 이내 그쳤다. 좋다 말았다.


언니가 집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병원에 가자며 들렀다. 아들 녀석은 이모가 집에 와서 신이 난 모양이다. 언니는 커피를 마시다가 바닥에 떨어져있는 머리카락을 줍겠다고 부엌문 가장자리에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식탁에 내려놓고 주워도 좋았을 것을 그랬다. 녀석은 바닥을 뒹굴며 발차기를 하며 놀다가 그만 이모가 내려놓은 커피잔을 건드리고 말았다. 커피잔이 넘어지면서 뜨거운 커피물이 아이 발등으로 쏟아졌다. 아이는 뜨거움과 통증에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돌발적인 상황에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양말을 벗겼다. 발등이 시뻘겋게 부어오르고 물집이 보였다. 


그런데 아이는 그때부터 이상한 신세 한탄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여덟살짜리 꼬마 아이가, 더욱이 내 아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놀다가 부주의로 커피물을 엎질러 발등에 화상을 좀 입었기로서니, 그걸 죄와 벌로 연결시킨다는 것이 내 상식선에서 이해가 안 됐다. 그것도 새까맣게 어린 놈이. 그 어린게 도대체 그런 말을 어디서 배운 것이냐.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우는 아이 치료부터 해야해서 언니 차를 타고 피부과로 달려갔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해서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병원이 떠내려가라 울어대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상당히 신경쓰였다. 좀 적당히 하지?하는 눈빛을 보냈더니 아이는 엄마가 제 맘을 몰라줘 서러운지 더 크게 울어댔다. 앞 사람의 양보로 아이가 먼저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의사는 아이의 얼굴을 톡톡 건드리며 죽을 병은 아니라고, 치료하면 아프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의사의 말에 안심이 됐는지 아이의 울음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런데 병원을 나와 약국으로 들어서자 아이는 치료 부위가 아픈지 또 다시 그 죄와 벌을 들먹거리며 울어제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지각은 있으련만. 정말 할 말을 잃었다. 화상도 흉터가 남을 만큼 중한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 아이의 통증은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걱정스럽기는 해도 그저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약사는 아이가 그렇게 소란을 피우는 것이 궁금했는지 이유를 묻는다. 약사도 어린 환자가 보통내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우스갯소리로 나중에 크게 될 사람이라고 놀린다. 나는 약사의 말에 한 번 더 실소했다.


아들은 아프다고 난리인데 엄마라는 사람은 그 고통에  동조하지 못하고 엄살이라고 여긴 면이 있었다. 더욱이 쪼끄만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게 노인네의 신세 한탄소리처럼 들려 웃기기도 했다. 웃자. 여덟살 먹은 아이의 입에서 그런 희한한 말이 터져 나올 줄이야. 세상 더 살아볼 일이다. 웃고 말자. 발등 화상 입었다고 죽기야 하겠는가.( 2011년 4월 30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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